제14장 신성(新城)함락 14 회
“결행을 아니한 것이 아니라 할 수가 없었지요.
홀로 여러 날을 망설인 끝에 잔뜩 마음을 뼈물고 요동성의 동문으로 말을 달려 나갔으나
우문술의 군대가 구름같이 막아서서 당최 길을 열어주지 않으니 무슨 수로 결행을 할 수 있었겠소?
마군 5백 기를 끌고 나갔다가 우문술과 10여 합을 겨루고 힘이 미치지 못해 돌아왔을 뿐이오.”
을지문덕이 우문술과 교전한 일은 우중문과 유사룡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것은 우문술을 탓하기 전에 그대가 실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오.
그와 같은 계책이 있다면 미리 밀사를 보내어 알렸어야지,
무턱대고 군사를 이끌고 나오면 뉘라서 그 내막을 알 수 있겠소?”
우중문이 퉁명스레 나무라자 문덕은 딱하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오.
이미 배구로 하여 예까지 온 나요.
내 다시 수나라의 누구를 믿으오리까?”
을지문덕의 반문에 우중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장군의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간에 안타까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구려.”
우중문과는 달리 양광이 배구의 말을 무시하고 군사를 낼 시초부터 이를 탐탁찮게 여겼던
유사룡은 문덕의 말을 듣고 나자 그가 투항하여온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은커녕 그는 문덕을 불신하고 마침내는 곤경에 빠뜨린 점에 대해 양심의 가책까지 느끼게 되었다.
“모든 것이 그저 운명이지요.”
문덕이 길게 한숨을 토했다.
유사룡은 맞은편에 앉은 우중문을 향해 가만히 눈짓을 보냈다.
그런 다음 자신이 먼저 일어나며,
“예서 목이라도 축이면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하고 바깥으로 나가자 우중문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유사룡을 따라나왔다.
유사룡은 막사 바깥에서 우중문에게 귀엣말로 얘기했다.
“내가 보기에 을지문덕이 투항하여 온 것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처음부터 배구와 함께 저 사람을 믿어보자는 축이었는데,
황제께서 굳이 군사를 내어 도리어 일을 어렵게 만든 게 틀림없소.
그런데 고구려왕 대원이 마침 요동에 이르러 문덕을 부른다고 하니 얼마나 잘되었소?
이런 호기도 흔치 않을 것이오.”
“호기라니요?”
“문덕을 잘 구슬러서 그로 하여금 대원왕의 목을 베어 오도록 한다면
지루한 요동 정벌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게 아니겠소?”
“……글쎄올시다.”
우중문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장군은 대체 무엇을 의심하시오?”
“을지문덕은 꾀가 많고 궁리속이 복잡한 사람이라 들었소.
그의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닌 듯 하외다.
만일 그에게 다른 속셈이 있다면 그때는 어찌하오?”
그러자 유사룡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문덕에 대한 황제의 지나친 의심이 결국은 일을 이처럼 어렵게 만들지 않았소?
죽기를 각오하고 온 사람에게 무슨 딴마음이 있겠소?
더군다나 을지문덕은 적지 않은 곡물과 마초까지 수레에 싣고 왔소.
이런 사람을 의심한다면 대관절 누구를 믿겠다는 말씀이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에는 그럴 법도 했다.
한 톨의 군량이 아쉬운 판에,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적장이 수십 대의 양곡을 싣고 왔다는 것은
꿍꿍이가 있는 사람의 행동이라 보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수나라 장수들의 상식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중문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유사룡이 더욱 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소곤거렸다.
“장군은 묘저의 일을 가볍게 보지 마시오.
묘저가 만일 장군의 애첩이 아니라 우문술 장군의 애첩이었다면
십상팔구 황제의 처신은 달랐을 것이오.”
“그것은 또 무슨 말씀이오?”
“황제께서 우문술 장군에게 경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장군도 잘 아시지 않소?
이는 우문 장군이 선제의 신하이기 때문이오.
황제께서는 우문 장군이 공을 세우는 것보다 장군이 대공을 세워주기를 내심 무척이나 바라고 있소.
그런데 지금 9군의 장수 가운데 신성을 취한 우문 장군말고는 아무도 공을 세운 이가 없지 않소?
황제께서는 우문 장군이 신성을 취하고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 이를 기뻐하시기보다는
도리어 또 우문술이냐고 탄식하는 것을 내 귀로 직접 들었소이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매사에 선제인 양견과 비교하기를 좋아했던 양광은 자신이 믿었던 우중문과 위문승에게
공이 없는 것을 특히나 무척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우문술 장군은 이미 신성을 쳐서 공을 세웠으나 장군은 아직 이렇다 할 공적이 없으니
자고로 유공한 자와 무공한 자 간에는 천양지차가 있는 법이외다.
다 같이 주색을 탐하고 군령을 어겼더라도 공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대함이 어찌 같을 수 있겠소?
묘저가 만일 우문 장군의 애첩이었다면 황제께서 가로채는 일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오.
묘저의 일은 믿었던 장군에게 별다른 공이 없으니
평소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기대가 도리어 미움과 원망으로 변하여 생긴 것이외다.”
유사룡의 말은 우중문에게 두렵고 섬뜩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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