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신성(新城)함락 13 회
“당초에 약조한 바대로 나는 그간 성주들을 설득하여 일이 성사될 때마다
성루에 깃발을 올리고 그 진행되는 바를 어김없이 알렸거니와 어찌하여
별안간 의심을 사게 됐는지 아무리 해도 그 연유를 모르겠소.
내가 만일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면 겉으로 화친하여 배구를 돌려보낸 뒤에
그 방심한 틈을 노려 얼마든지 군사를 낼 수도 있었던 일이 아니오?
실제로 작심만 했더라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수군 진영을 보아 그럴 만한 기회도 허다히 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 차례도 군사를 낸 일이 없소.
내가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으니 남평양의 우리 조정에서는 나에 대한 의심과 탄핵이
꼬리를 물어 드디어는 대원왕이 요동으로 와서 지경을 살피고 나를 문초하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렀소.
한데 한창 그럴 무렵 배구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일의 진척을 묻기에 나는 대원왕이
요동으로 행차하기를 기다렸다가 어가를 포박하여 황제께 대공을 세우겠다는 말까지 하였는데,
심부름꾼이 돌아가자마자 까닭없이 일이 틀어지니 배구란 자가 황제 폐하께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소.
설마 현명하신 황제께서 제대로 전하는 말을 듣고도 군사를 내었을 까닭이 있으리까.
배구란 자는 과연 믿지 못할 자요.
어쩌면 그는 내가 대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일부러 황제께 나를 모함한 것인지도 모르겠소.
만일 배구가 내 뜻을 곧이곧대로만 전했더라도 귀공들은
여기서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께서도
지금쯤은 남평양의 대궐에 자리를 높이하고 앉아 고구려의 군신을 상대로 죄와 공을 논하였을 것이오.
내가 배구를 만나 황제 앞에서 따지고 벌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오!”
문덕은 배구에게 새삼 격분한 듯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사룡과 우중문도 섣불리 배구를 변호하거나 두둔하지 못했다.
배구를 변호하거나 두둔하는 것은 약조를 어긴 황제의 체면과 위신을 깎는 일이었다.
잠자코 있던 우중문이 미처 의심이 가시지 않은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리 그렇기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결사항전을 하던 그대가 아니오?”
문덕은 우중문이 깊이 의심하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살기를 바라고 오지 않았으니 더 이상 구구하게 말하지 않겠소.
장군은 어서 나를 효수하고 그 기세를 몰아 요동을 취하시오.”
문덕이 단호하게 말하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우중문이었다.
그는 을지문덕이나 대원왕을 만나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양광의 교지를 이미 받고 있었던 터라
함부로 문덕을 처리할 형편이 못 되었다.
유사룡이 황급히 끼어들어 부드러운 말로 문덕을 다독거렸다.
“자고로 항장은 불살이라 하였으니 어찌 항복하러 온 장군을 죽일 수 있겠소.
다만 좀 전까지 그럴 기미가 통 보이지 않다가 창졸간 이런 일이 생기니
우리들로서야 그 숨은 까닭이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가 아니오?
기왕 털어놓는 김에 저간의 사정과 속엣말을 아주 후련하게 털어놔보구려.”
유사룡의 은근히 다그치는 말에 문덕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역지사지로 내 형편을 짐작해보면 굳이 그렇게 물을 일도 아니외다.
아랫사람의 신망을 잃고 윗사람의 은혜를 저버린 내가 갈 곳이 과연 어디겠소?
대원왕은 나의 반역한 혐의를 확인하러 지금 압록수 근교에 이르렀고,
사람을 보내 나를 오골성으로 부르니 이는 틀림없이 요동 일대에 파다하게 퍼진
나에 대한 말을 듣고 죽이려는 것이오.
내가 요 며칠 사이에 먹고 자는 것을 잊고 곰곰이 생각하니
기왕에 죽을 목숨이라면 품속에 날을 벼린 비수를 지니고 왕에게 접근하여
황제께 마지막으로 나의 본심을 입증해 보이자,
실은 그런 마음까지 품었다오.”
문덕은 잠시 말허리를 자르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문덕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의 눈빛은 푸른빛이 돌 정도로 형형하게 빛났다.
“그런데 어찌하여 결행하지 아니하였소?”
침묵이 길어지자 우중문이 따지듯이 물었다.
그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문덕은 짐짓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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