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4장 신성(新城)함락 15 회

오늘의 쉼터 2014. 8. 3. 13:36

제14신성(新城)함락 15

 

 

“을지문덕이 우문 장군의 진채로 가지 아니하고 하필 이쪽으로 온 것은 장군의 크나큰 복이요,

 

운수가 대통한 것이외다.

 

장군은 이제 가만히 앉아서 우문술의 횡초지공을 뛰어넘는 대공을 세우게 되었소.

 

황제의 신뢰를 되찾는 데 이보다 좋은 기회가 또 어디 있겠소?

 

우문 장군이 을지문덕에게 열어주지 않은 길을 장군이 열어주시오.

 

나중에 일이 잘되어 을지문덕이 대원왕의 목을 취하여 온다면

 

요동 정벌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장군이 아니겠소?”

우중문은 쉽게 결단하지 못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야 누구보다 강하고 뜨거운 그였지만 을지문덕이나 대원왕을 보거든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조칙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우중문이 그 말을 꺼내자 유사룡이 딱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찌 장군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오?

 

조칙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오.

 

모든 조칙과 군령은 궁극에 이기기 위해 있는 게 아니겠소?

 

설마하니 장군으로 말미암아 요동을 취하였는데 황제께서 조칙 어긴 것을 탓하겠소?”

우중문은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가,

“만사를 포기하고 항복한 을지문덕이 다시 대원왕을 죽이러 가려고 할는지도 의문입니다.”

하고 걱정스레 말하였다. 유사룡이 슬그머니 웃으며,

“세상에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는 요동성의 동쪽에서 길을 얻지 못하자

 

공을 세울 욕심으로 실은 우리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온 것이 틀림없소.”

하고서,

“그 일은 내게 맡겨두오!”

입찬말로 장담했다. 양자가 속닥거리기를 마치자

 

유사룡이 먼저 앞장서서 문덕이 기다리는 막사로 들어갔다.

“지금 고구려왕 대원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소?”

유사룡이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요동성으로 오는 길은 이미 막혔으니 아마도 곧 남쪽 오골성에 당도할 것이오.”

“오골성의 성주는 어떤 사람이오?”

“우민은 본래 신성 성주 추범동과 마찬가지로 나의 휘하에 있던 장수외다.

 

혼자서 능히 1천 군사를 상대할 만치 용맹과 기개가 뛰어나지만

 

일전에 각 성의 성주들을 불러 투항을 권유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따르기로

 

맹세할 만치 나하고는 막역지간입니다.”

유사룡은 내심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만일 장군이 오골성으로 가면 과연 우민을 제압할 수가 있소?

 

전날 신망을 잃은 탓으로 그가 돌연 태도를 바꿔 장군을 해치지는 않겠느냐는 말씀이오?”

“글쎄올시다. 모르긴 해도 우민이라면 속에 더러 불만이야 있겠지만

 

누구보다 나의 무예를 잘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렇게까지 함부로 나오지는 않을 거외다.”

을지문덕은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나서,

“그런데 그 말은 어째 묻소?”

하고 반문하였다.

 

이에 유사룡은 을지문덕에게 자신의 뜻한 바를 가만히 털어놓았다.

 

오골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줄 터이니 대원왕을 산 채로 붙잡아

 

황제께 귀화(歸化)와 투항의 대공을 세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문덕은 표정 없는 얼굴로 유사룡의 제안하는 바를 다 듣고 나서 한참을 말이 없다가,

“이미 살기를 포기하고 예까지 온 나요.

 

쥐구멍만한 살길이 있다 한들 어찌 그곳으로 가지 않겠소?”

하고서,

“만일 내게 그럴 기회를 준다면 힘과 궁리를 다해 귀공들의 은공에 보답하리다.”

믿음이 가는 어투로 말끝을 분질렀다.

 

유사룡은 크게 기뻐하며 우중문과 몇 마디 귀엣말을 나누고 나서,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나기로 하고 오늘밤은 우리 세 사람이 만난 기념으로다 실컷 회포나 풉시다.”

하고 주연을 벌이자고 하였다. 그러나 문덕은 이를 거절하며,

“마시고 노는 것은 일이 끝난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대사를 앞에 놓고 마시는 술에 어찌 취할 수 있을 것이며,

 

제아무리 소리를 높여 떠들고 논다 한들 무슨 흥이 나겠소?

 

차라리 오늘 밤중에 떠나서 하루라도 먼저 오골성에 당도하여

 

우민과 더불어 왕을 사로잡을 계책을 세우는 편이 한결 낫겠습니다.

 

주연은 일이 성사되고 난 뒤에나 베풀어주시오.”

말을 마치자 몸을 일으켜 당장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문덕이 성큼성큼 막사 바깥으로 나와 기척을 내자

 

캄캄한 어둠 속에서 검은 말 한 마리가 비호처럼 나타나 문덕의 앞에 섰다.

 

문덕은 미처 만류할 겨를도 없이 훌쩍 말잔등에 올라탔다.

 

우중문이 훤한 달빛에 보니

 

철갑옷을 입힌 흑마의 엉덩이 양쪽으로 똑같은 크기의 흰 점이 큼지막하게 박혔는데,

 

말갑옷과 흰 점이 마주치는 어름에 갑옷과 칼 한 자루가 줄로 단단히 묶인 채 매달려 있었다.

“두 분께서는 오늘부터 베개를 높이하고 편히 주무시오.

 

열흘 안쪽에 오골성에서 반드시 좋은 기별이 있을 것입니다.”

“술도 대접하지 못하고 이렇게 헤어지자니 아쉽소. 모쪼록 몸조심하오.”

문덕의 말에 유사룡이 못내 서운해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자

 

문덕은 마상에서 공손히 허리를 굽혀 답례한 다음 쏜살같이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