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신성(新城)함락 12 회
“하나 기왕에 엎질러진 물이니 지금에 와서 후회하고 한탄한들 무엇하겠소.
돌이켜보면 그 모두가 운명이요,
또한 자업자득이지요.
환관 배구가 요동성을 찾아왔을 때 대국의 신하라고 무턱대고
그를 믿은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불찰이요,
천자의 인품에 반하여 오랫동안 섬겨온 주군을 하루아침에 배신하고자 한 일도
장부로서 과히 떳떳한 노릇은 아니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그 천벌을 받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오.
단지 천추에 남을 한이 있다면 그리워하던 천자 폐하를 뵙지 못하는 것과,
어려서부터 가슴에 담아 키워온 장부의 기개를 마음껏 펴보지 못한 것이오.
귀공들은 어떤 경우에도 한번 섬긴 주군을 배신하지 마시오.
이는 나라와 지경을 초극하여 같은 장부로서 드리는 충언이외다.
그리고 밖에 가져온 소량의 양곡과 마초는 황제 폐하께 바치는 나의 마지막 정성이오.
나를 죽이고 나거든 폐하께 내 목과 함께 지금의 이 말을 꼭 전하시오.
그러면 비록 이 몸은 죽고 없더라도 일전에 배구한테 털어놓았던 얘기들이
나의 가식 없는 진심이었음은 황제께서도 의심하지 않을 게 아니겠소?”
우중문과 유사룡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문덕이 짐짓 비장한 말투로 덧붙였다.
“귀공들은 모쪼록 힘과 궁리를 다해 소국을 멸하고 부디 황제를 도와 천하를 하나로 아우르시오.
을지문덕은 천운이 박복하여 비록 살아서는 황제를 모시지 못하였으나 죽어 저승에 가서는
원력을 다해 제업의 번성함을 돕겠소.
이제 내 말은 끝났으니 장군은 어서 나를 줄에 묶어 장졸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고
군사의 사기를 북돋우시오.
내일 날이 밝아 내 목을 앞세우고 요동성으로 진격한다면 십상팔구 성은 쉬 함락될 것이리다.
또한 고구려의 대원왕은 지금 압록수를 건너 내달 초순쯤엔 오골성에 이를 터인즉,
모든 군사를 끌어 모아 시급히 오골성을 공략하시오.
그는 본래 요동으로 나를 만나러 올 계획이었지만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그대로 돌아갈 공산이 크니 잠시도 지체할 일이 아니오. 내 말을 필히 명심하시오.”
문덕의 말이 끝나자 우중문도 술병을 집어 들고 게걸스레 목을 축였다.
그는 꿈에서도 예견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을 당하게 되자 갑자기 머릿속이 통째 멍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나는 도무지 장군의 말씀하시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겠소.
왜 갑자기 투항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어디 좀 소상히 설명을 해보오!”
우중문의 말에 이어 유사룡도 문덕의 앞으로 무릎을 바짝 당겨 앉았다.
“나는 상서우승 유사룡으로 황문시랑 배구와 막역지간이오.
장군이 전날 배구와 했던 약속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니 그 후의 일들을 말해보시오.”
두 사람이 재촉하자 문덕은 한참만에야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어 물었다.
“우승께서 배구와 막역지간이라니 그가 지난날 항복을 권유하는 황제의 서찰을 지니고
요동성에 왔을 때 두세 달 동안 내게 말미를 준 것도 잘 알고 계시리이다?”
유사룡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의 일언은 천금이외다.
하물며 목숨을 건 싸움터에서 신의를 걸고 하는 언약의 위중함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소.
나는 배구의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요동의 성주들을 한 사람씩 불러다가 표나지 않는 말로써
은근히 그 심중을 떠보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나를 만난 일곱 성의 성주들은
내가 앞장을 서기만 한다면 한결같이 따르겠다는 언질을 주어서 약속을 이행하는 데는
별무리가 없어 보였소.
한데 성주들이 한 가지 우려하는 바는 압록수 건너에 두고 온 가까운 혈족들의 일이었소.
귀공들도 잘 알다시피 우리 고구려는 관리의 임기가 별도로 있어 성주들 중에는
처자도 임지에 데려오지 못한 사람이 많고,
부모 형제들은 거개가 남평양의 도성 근교에 살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황제의 덕업과 인품에 반하여 투항을 한다면 고구려 조정에서
우리의 구족을 샅샅이 찾아내어 멸할 것은 보지 않더라도 뻔한 일이 아니겠소?
귀공들도 처자와 혈족들이 있을 것이므로 그 심정은 능히 헤아릴 거라 믿소이다.”
“그럴 테지요.”
유사룡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해서 성주들과 의논하기를 이런저런 핑계로 화를 당할 만한 가까운 혈족들을
모두 이쪽으로 불러들인 뒤에 적당한 날을 잡아 일제히 투항하기로 밀약하고
한창 분주하게 일을 꾸미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배구와 했던 약속은
졸지에 물거품이 되고 각지에서 황제의 군사들이 창칼을 앞세워 우리를 공격하니
그 당혹스러움은 차치하고 그간에 쌓아온 나의 신망도 한순간에 짓밟혀 성주들치고
나를 불신하고 욕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소.
그러니 난들 어찌 배구를 탓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며,
신의를 저버린 수나라의 처사를 야속하게 여기지 않으오리까.”
문덕의 원망하는 말을 듣자 유사룡은 입맛을 쩍쩍 다셨고,
우중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덕이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허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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