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생존자 (3)
휴대폰을 내려놓은 강한은 길게 숨을 뱉었다.
이춘식이 휴대폰을 놓고 화장실에 갔다는 게 이상했다.
요즘은 화장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우나에도 휴대폰을 들고가는 세상이다.
특히 이춘식은 상황이 급박하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으로 떨었으므로 강한은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춘식이다.
"여보세요."
휴대폰을 귀에 붙인 강한이 말했을 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뵙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넌 누구냐?"
강한이 묻자 사내가 멈칫하더니 대답했다.
"동생 한대식입니다."
"이춘식은 어디있는데?"
"좀 멀리 가셨습니다."
"그래서 나하고 통화가 안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춘식이 전화는 네가 갖고 있고?"
"그렇죠."
"무슨 일 있나?"
강한이 묻자 사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이 잡혔습니다."
"누구한테?"
"회장한테."
"……."
"들통난 거죠."
"……."
"우린 겨우 도망나왔습니다. 그래서…."
"……."
"정보를 팔겠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전화할 테니까 기다려."
"언제 말씀입니까?"
"며칠 후에."
그리고는 강한이 잇사이로 말했다.
"그동안에 네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겠지. 한대식이라고 했지?"
통화를 끝낸 강한이 머리를 들고 아래를 보았다.
점심시간이어서 소공동 뒷길은 남녀 회사원들로 혼잡했다.
카페 2층 창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 표정이 대부분 밝다.
밥 먹은 사람들은 상기된 얼굴로 지나갔고
아직 식사 전인 군상들의 표정도 기대감에 차 있었다.
강한이 손목시계를 보았을 때 카페 입구로 유기호가 들어섰다.
유기호는 말쑥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 동네 분위기에 어울렸다.
앞에 앉은 유기호가 말했다.
"백용철이는 3개월쯤 후에는 회복될 겁니다.
하지만 조재일은 시간이 더 필요해요.
최소한 1년은 걸릴 것 같습니다."
강한은 잠자코 머리만 끄덕였다.
유기호는 백용철과 조재일의 뒤처리를 해주고 온 것이다.
병원 수속과 비용, 간병인 문제까지 다 해결했다.
강한은 식어서 탕약 맛이 된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이번에 최광규를 기습해서 제거하려던 계획은 역습을 받아 철저하게 실패했다.
매수했다고 생각했던 최광규 경호팀장 이춘식까지 제거된 상황이다.
그때 강한이 입을 열었다.
"이춘식이 잡혔다는군요."
강한이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말했을 때 유기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저었다.
"함정입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놈들 뒷통수를 치잔 말씀입니까?"
"상황을 먼저 알아봐야겠어요."
"제가 알아보지요."
그러더니 유기호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숨을 뱉었다.
"어렵군요. 최광규 잡기가 말입니다."
"서둘 필요는 없어요."
낮게 말한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는 우리가 당했지만 다음에는 기회가 올 겁니다."
"그래야죠."
따라 일어섰던 유기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최광규의 동거녀 장세희는 애인이 있더군요.
지금도 장세희하고 가끔 연락하고 만난다고 합니다."
강한의 시선을 받은 유기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래서 장세희 애인한테 24시간 미행을 붙여 놓았지요."
닷새만에 강한을 만났지만 장미는 힐끗 시선만 주더니 TV로 머리를 돌렸다.
저녁 8시 반이다.
식사를 하고나서 장미는 2층 응접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가운만 걸친 차림이었다. 앞에 앉은 강한이 TV를 보았다.
날씬한 몸매의 여자 아나운서가 유창하게 일기예보를 하는 중이었다.
한참을 들었지만 한자도 더듬거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말했다.
그래서 녹음된 테이프를 말하는 인조인간 같았다.
머리를 돌린 강한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유진홍 한테서 3백억을 받아내기로 하자."
장미는 그대로 TV를 보았지만 리모컨으로 음소거를 시켰다.
그러자 아나운서의 손짓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소파에 등을 붙인 강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충청북도 영동 근처에 지금 실버타운을 건설하고 있어.
사업 허가도 받았고 매입한 부지 14만평에서 다음 달부터 공사가 시작돼."
놀란 장미가 강한을 똑바로 보았다.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않는다.
"이미 125억이 투자되었고 앞으로 200억 쯤 더 투자될거야."
"실버타운?"
장미가 불쑥 물었다.
얼굴에 난데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게 뭐하는 건데?"
"노인 복지시설."
"아파트같은 걸 지어서 파는 거야?"
"복지라니까."
입맛을 다신 강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의탁할 곳 없는 노인이나 가난한 노인, 고아나 장애인까지 수용해서 돌봐주는 시설이야.
병원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
"타운 안에 학교, 종교시설, 매장과 자립시설까지 골고루 갖춰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만들거야."
"……."
"해당 지방자치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있어, 물론 자금은 내가 내지만 말이야."
"네 이름으로 낸 거라구?"
마침내 장미가 손끝으로 강한의 코를 가리키며 물었다.
크게 뜬 눈이 불빛을 받아 반들거리고 있었다.
"이게 아주 돌았군 그래, 네가 무슨 일로 돈을 벌었는데? 아이구, 곧 자금추적이 되겠구만."
"노인복지연구소란 단체를 통해 내 돈이 기부된거야. 그러니까 걱정 안해도 돼."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말을 이었다.
"노인복지연구소 소장이 실버타운의 형식상 대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그러자 어깨를 늘어뜨린 장미가 다시 물었다.
"솔직히 말해. 재투자한 거야?"
강한이 머리를 저었다.
"나중에 실버타운에서 일하겠지만 영리 목적으로 투자한 건 아냐,
더럽게 번 돈을 좋은 일에 써보고 싶었던 거야."
"……."
"내가 너한테 이 말을 한 건…."
강한이 들고온 대형 서류봉투를 장미 앞으로 밀어놓았다.
"내 대리인은 너야, 나한테 무슨 일이 있을 때 네가 내 대신이 된다고 공증도 받아놓았어,
그러니까 실버타운을 운영하는 장미재단의 공동 운영자는 너하고 나란 말이야."
"내 허락도 받지않고 어떻게."
눈을 크게 뜬 장미를 향해 강한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쯤은 아무 것도 아냐. 좋은 일 하니까 다 도와주더라."
"네가 죽으면 실버타운은 내 소유가 된단 말이지?"
장미가 불쑥 물었지만 강한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소유란 건 좀 그렇지만 네가 유일한 운영자가 되는 거지."
"얼마 투자했다구?"
"앞으로 할 것까지 350억쯤, 더 될지도 몰라."
"번 돈 다 쏟아부을거야?"
그렇게 물었던 장미가 다시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었다.
"어쩌면 좋아. 내가 미친놈 만났어."
다음날 오전, 장미는 김희선이 직접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안면도로 향했다.
안면도에 유진홍의 별장이 있는 것이다.
2월초의 바닷가 하늘은 푸른색 사파이어처럼 맑았으며 햇살은 환했다.
밖은 영하의 날씨였지만 추위를 실감하지 못하는 안에서 보면 밝은 날의 여름 같았다.
왼쪽으로 펼쳐진 바다와 갯벌에 겨울 흔적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는 장미를 힐끗 쳐다본 김희선이 입을 열었다.
"혹시 강사장이 딴일 하지는 않겠지?"
"딴일?"
머리를 든 장미가 되물었다가 금방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줌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내 말은…."
조금 당황한 김희선이 차의 속력을 줄였다.
차는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 있었는데 평일의 겨울이어서 차량 통행이 드물었다.
김희선이 말을 이었다.
"한여사가 어렵게 만들어준 일인데 그쪽 체면을 봐 줘야지, 안그래?"
"내가 아줌마 속셈을 알지."
의자에 상반신을 붙인 장미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유진홍을 두고 두고 긁어 먹으려는 심보아냐?
판이 깨지면 두번 다시 여자를 붙여줄 수 없을테니까 말이야."
"어쨌든 일 벌리면 안돼. 내가 따로 강사장한테 연락하겠지만 말이야."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 김희선이 차를 거칠게 몰았다.
"3박4일에 10억이야.
한국에서 그만큼 내놓을 큰손 드물다.
요즘 아무리 잘 나가도 그만큼 못받아."
"난 수녀라구."
앞쪽을 노려본 채 장미가 정색하고 말했다.
"거기에다 처녀야."
김희선은 입을 다물었고 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거기에다 나한테 한번 빠지면 유진홍은 기절할걸?"
"……."
"내기할까?"
장미가 물었지만 김희선은 앞쪽만 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로이 피터슨이 평균 몇초만에 싼줄 알아?
잘난 척 했지만 최장 시간이 20초도 안됐어, 17초인가 그래."
"……."
"그런데도 줄기차게 달려들었지,
만회하려고 그런게 아냐,
한번 빨리고 나면 또하고 싶어서 정신을 못차리는 거야."
"……."
"그러다 골로 가는 거야."
김희선의 옆모습을 향해 장미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내가 적절하게 컨트롤을 하지 않으면 진짜루 복상사한다니까."
"네가 명기인건 인정해."
어깨를 늘어뜨린 김희선이 입맛을 다시고나서 말을 이었다.
"내가 유진홍을 몇번 더 이용해먹을 작정이었다는 것도 이실직고 할게. 하지만…."
김희선이 머리를 돌려 장미를 보았다.
"지난 번 김명준이도 그랬고 이복만이도 그랬어,
난 네 덕분에 손님들 다 끊겼다구.
소문이 났단 말야.
내가 공갈단 두목이 되었다고 말이야."
"알았어."
말을 자른 장미가 정색하고 앞을 보았다.
"내가 강한한테 이야기할게."
"뭐라고 이야기 할건데?"
김희선이 장미한테 시선을 주다가 길가의 작은 구덩이를 피하지 못해 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기겁을 한 김희선이 핸들을 움켜 쥐고는 속력을 늦췄다.
"아줌마 사정 이야기 할테니까 이제 그만해. 분위기 드러워지니까 말이야."
장미가 소리치듯 말하자 김희선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만하자."
"나한테 맡겨."
눈을 치켜뜬 장미가 앞쪽을 노려보았다.
"일을 맡은 이상 내가 대장이야. 내 지시를 받기로 되어 있다구."
차 안에는 낮은 엔진음만 울렸고 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손해를 봤다면 그만큼 보상할게."
현관 문을 연 유진홍은 숨을 들이켰다.
문 앞에 수녀가 서 있었다.
수녀복 차림의 그녀는 시선을 내리고 있었는데 천천히 머리를 들어 유진홍을 보았다.
숨을 멈춘 채 있던 유진홍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미인이다.
아니, 유진홍의 인생에서 여자를 처음 봤을 때 이렇게 감동해본 적이 없다.
"안녕하셨어요."
수녀 뒤쪽에서 김희선이 인사했을 때에야 유진홍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에 김희선이 서 있었던 것이다.
불과 몇 초밖에 안됐지만 유진홍은 얼이 빠져 있었던 터라 당황했다.
"아이구, 들어오십시오."
비켜선 유진홍이 더듬대며 말하자 머리를 숙여 보인 수녀가 안으로 들어섰다.
스쳐 지나는 수녀한테서 옅게 향내가 풍겨왔다.
유진홍은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내였다.
화장품 냄새가 아닌 살 냄새 같다.
넓은 별장 안은 그들 셋 뿐이었다.
응접실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유진홍이 김희선에게 말했다.
"심부름하는 사람을 내보내서요."
"괜찮아요."
대답을 수녀가 했으므로 긴장한 유진홍이 시선을 돌렸다.
그때 수녀가 머리수건을 벗었다.
유진홍은 다시 숨을 삼켰다.
머릿수건이 벗겨진 순간 긴 머리가 어깨 위로 쏟아지듯 내려덮인 것이다.
크게 웨이브된 검은 머리는 풍성했고, 갸름한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 장미라고 합니다."
장미가 유진홍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요."
김희선이 들고온 가방을 눈으로 가리켜 보인 장미가 말하자 유진홍은 벌떡 일어섰다.
"아, 저기, 저방에서…."
안내하려는 듯이 한발짝을 뗐던 유진홍이 곧 상황을 눈치채고 멈춰서서 말했다.
"안에 욕실도 있으니까 천천히…."
"난 갈테니까."
김희선이 장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걱정말고 잘 지내. 유사장님 믿을만한 분이시니까 말이야."
가방을 든 장미는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은 최고급 가구와 전자제품으로 장식돼 있었고,
단층이었지만 면적이 100평도 넘어 보였다.
방은 침실이었는데 침대는 수입 명품 브랜드였다.
안쪽의 욕실을 열자 장미의 눈이 둥그레졌다.
욕실 넓이가 10평도 넘어 보였기 때문이다.
둥근 욕조는 다섯 명이 들어가 누워도 될만큼 컸고 안쪽에는 사우나실도 있다.
장미는 가방을 열어 가운을 꺼냈다.
그리고는 가운 밑에서 휴대폰을 집어들고 버튼을 눌렀다.
"응, 나야."
기다리고 있던 강한이 벨이 울리자마자 응답을 했다.
심호흡을 한 장미가 욕실 밖의 침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안장치가 많아.
문은 자동 경보장치가 되어있고 보안회사에서 설치한 CCTV도 응접실 천장에 붙어있어."
"당연히 그렇겠지."
"침실과 욕실엔 없는 것 같아."
"그것도 당연하지."
강한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가 그 장면을 보이려고 하겠어?"
"김마담은 손님 놓친다면서 장난치지 말라는 거야."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
"오늘은 그놈 정신을 쑥 빼놓으라구."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장미는 길게 숨을 뱉었다.
장미가 가운 차림으로 응접실로 나갔을 때 김희선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돌아간 것이다.
소파에 혼자 앉아있던 유진홍이 눈이 부신듯한 표정으로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진주색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맨 다리가 드러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운의 깃이 벌어져 허벅지까지 보였다가 감춰졌다.
장미가 앞자리에 앉았을 때 유진홍이 고인 침을 꿀떡 삼키고 나서 물었다.
"정, 정말 처녀인가요?"
장미가 똑바로 유진홍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장미가 시선을 준 채 대답했다.
차분한 표정이었으므로 오히려 유진홍이 눈을 내렸다.
장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몸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아, 아니, 전혀…."
다시 당황한 유진홍이 손까지 저었다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돈으로 몸을 흥정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운데 실은…."
"아녜요."
정색한 장미가 머리를 저었다.
"저도 수녀원에 오래 있었지만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요.
성이 얼마나 문란해졌는지도 압니다."
"어쨌든 난 룸살롱에서 놀던 버릇이 들어서."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는 유진홍이 장미를 똑바로 보았다.
슬슬 자신감이 살아난 것이다.
"장미씨는 몇 살때 수녀원에 갔죠?"
"열여덟 살요.
그때까지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나서 바로 수녀가 됐어요."
장미가 거침없이 말했다.
"준비는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다 했었고,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집에서는 반대 안했구요?"
유진홍이 묻자 장미는 머리를 끄덕였다.
"중학때부터 수녀가 된다고 했으니까요."
"그랬는데 그만 뒀군요."
"네, 그 이유는 들으셨겠죠?"
"들었습니다."
정색한 유진홍이 시선을 내렸다.
장미의 어머니는 지난 달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뺑소니 사고로 아버지가 1년 반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다가
돌아가신 바람에 빚이 쌓여 어머니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거기에다 동생마저 자살미수로 병원에 입원한 것으로 돼있다.
장미가 머리를 들고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12시 반이다.
집 안은 조용했다.
방음 장치가 잘 돼있는지 밖의 소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저기."
장미가 입을 열었을 때 딴전을 피우고 있던 유진홍이 시선을 들었다.
눈에 열기가 실려 있는 것을 본 장미는 숨을 들이켰다.
저 눈빛은 바로 섹스에 대한 갈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저, 시험해 보실래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묻자 유진홍은 먼저 침부터 삼켰다.
"아직 시간이 많은데."
유진홍의 목소리는 메마른 데다 들떴다.
그러자 장미가 정색했다.
"저, 어떻게 하는 줄 몰라요.
하지만 남녀 구조나 아이를 어떻게 임신하고 낳는 것은 알죠."
"……."
"성에 대한 충동은 가끔 느껴보았어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거기가 젖어 있을 때도 있었어요."
"……."
"거기에 뭘 넣고 싶었던 충동도 있었지만 한번도 그런 적은 없어요."
그때 유진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미는 곁눈으로 유진홍의 사타구니가 솟아 올라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침실로…."
유진홍이 말하더니 어그적거리는 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그 순간 웃음이 치밀어 올라온 장미는 이를 악물었다.
장미가 침실로 따라 들어섰을 때 유진홍은 베란다쪽 창에 커튼을 치는 중이었다.
"침대에 들어가 있어요."
장미에게 등을 보인채 유진홍이 말했다.
커튼의 리모컨 버튼을 눌러 다 닫혔는데도 유진홍은 끝을 붙이려는 듯 꾸물대고 있었다.
"저어, 다 벗을까요?"
장미가 물었을 때 유진홍은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찔끔했다.
"응, 그, 그게 낫겠지."
"저어, 제가 배란기 계산을 잘 못하는데, 멘스가 이틀 전에 끝났거든요?"
그 순간 유진홍이 머리를 돌려 장미를 보았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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