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생존자 (1)
한 시간 후에 강한이 다시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두 번 울리고 나서 연결됐다.
"누구야?"
이번에도 이춘식이다.
다른 휴대폰으로 연락했기 때문에 이춘식은 아직 이쪽을 모른다.
강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한이다. 고민해 봤나?"
"넌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나?"
이춘식이 되묻자 강한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차분한 억양으로 대답했다.
"나라면 받는다."
"너하고 내가 같다고 생각하나?"
"20억이야."
자르듯 말하고 나서 강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광규한테 직접 흥정해도 되겠지만 그놈 주머니 불려주기 싫어서 너한테 제의한 거야."
"……."
"너 최광규한테서 아직 가게 한 곳도 물려받지 못했지?
물려받아도 월 500 이상 가져가지 못한다는거 내가 다 안다.
삥땅 뜯다가 걸리면 손가락 잘리고 내쫓긴다는 것도. 최광규가 15년째 보스 노릇 하고 있지만
그 밑에서 잘 된 놈 있나 봐. 변변한 집 한 채 가진 놈이 있나 보라구.
12년째 심복인 하모니 클럽 윤기호도 작년에 30평 아파트로 들어갔지?
모자란 돈 1억2000을 월급에서 공제하는 조건으로 최광규한테서 빌렸다면서?"
"……."
"내가 지난 번에 최광규 서초동 빌라에서 얼마 털어간지 알아?
현금하고 수표로 230억원 가량 된다.
아마 허드슨 빌라에도 그만큼은 쌓아 놨을걸?"
"……."
"20억이다. 네가 조재일이를 보내기만 하면 네 계좌로 보내주마."
"그걸 어떻게 믿지?"
마침내 이춘식이 그렇게 물었으므로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난 돈 욕심이 없는 인간이야.
최광규하고는 종자가 다르다는 걸 네가 믿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30억으로 하고 선금을 먼저 보내."
불쑥 이춘식이 말하자 강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었다.
"좋아. 먼저 10억을 보내지.
그걸 먹고 안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를 생각해서 안전장치를 해두지."
"무슨 말이야?"
"그땐 네 계좌번호를 최광규한테 알려주겠다는 말이다.
입금액이 얼마인지는 금방 알 수 있을 테니까."
"조재일이를 강탈해 가도록 해."
"방법은 네가 만들어봐."
"그럼 한 시간 후에 다시 연락해."
이춘식이 말하더니 먼저 전화를 끊었으므로 강한은 길게 숨을 뱉었다.
"끌려든 것 같은데요."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있던 유기호가 말했다.
둘은 경부고속도로의 상행선쪽 안성 휴게소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강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한번 더 끌어당겨 봅시다."
"어떻게 말입니까?"
"조건을 하나 더 내놓고 보상액도 늘려 보지요."
그리고 한 시간 후가 되었을 때 강한은 다른 휴대폰으로 이춘식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는 이춘식이 전화를 받더니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조재일이를 옮길테니까 네가 덮쳐서 뺏어가. 그럼 되겠지?"
강한의 목소리를 확인한 이춘식이 대뜸 말했다.
"네가 잘 쓰는 총으로 말이야. 차에는 애들이 셋 있을거야."
"조재일이 상태는?"
"정신은 돌아왔지만 움직이기는 힘들어."
그러자 이를 악물었다가 푼 강한이 입을 열었다.
"조건이 하나 더 있어. 물론 보상도 더 해주마. 20억을 더 보태서 50억이다."
"……."
"목표는 최광규, 거기에다 그 놈을 없애게되면 그 놈 금고의 현금 반은 네거다."
장미가 김희선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오후 3시경이었다.
천상태를 시켜 빌려온 비디오 필름으로 멜로물을 보고 있던 참이라
장미는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아줌마, 웬일이야?"
하고 묻자 김희선은 혀부터 찼다.
전에 김희선이 양모 노릇을 할 적에는 깍듯하게 어머니라고 불렀던 장미였다.
"너, 며칠 쉬었으니까 이틀만 일하지 않을래? 아주 좋은 건수가 생겼는데."
목소리는 상냥하게 들렸지만 장미는 전화기를 쥐고 있는 김희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꼬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장미가 잠깐 눈을 크게 뜨고 앞쪽을 보았다.
천상태는 반찬거리를 사려고 나갔으므로 집안에는 혼자뿐이다.
폐 안에 고인 숨을 소리죽여 뱉고 난 장미가 물었다.
"누군데? 어떤 조건이야?"
"한여사가 강남에서 물어왔어.
벤처업체 사장인데 글쎄 돈을 물쓰듯이 한다는구나,
재산이 몇천억이래."
"요즘도 그런 물건이 남아있네."
"네 필름을 보더니 이틀에 5억 낸단다. 이박삼일에 말이야."
"이번에는 내가 뭐가 됐는데?"
"넌 수녀로 있다가 지난달에 옷벗고 나온 스물세살짜리 처녀야."
"미치겠네."
"열여덟살에 수녀원에 들어갔다가 지난 달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동생이 자살하려다가 실패해서 병원에 입원하자
넌 수녀생활을 청산하게 된거야. 아주 슬픈 사연이지."
"얼씨구."
"넌 이를 악물고 네 동생을 위해서 몸을 내놓은 거지.
그랬더니 샤니 텔레콤 유사장이 이박삼일에 5억을 낸다고 했다는구나. 글쎄."
"미친놈."
"한여사가 각본은 아주 잘 만든단다. 전에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말이 맞나봐."
"미친년."
"얘, 그런말 하는거 아니다."
김희선이 점잖게 나무랐다.
"한여사는 밤잠 안자고 이야기를 만든거다. 직업 정신에 투철한 분이셔."
"돌겠네, 정말."
"샤니 텔레콤 유사장은 서른다섯이라는데 한달에 유흥비로 10억은 쓴댄다."
"하긴 그런 미친놈이 있으니까 여럿이 먹고 살겠지."
"잘 생겼더라. 사진 보니까."
"근데 아줌마. 나 요즘 컨디션이 안좋아.
거기가 따끔거리는 게 피터슨 그놈한테서 병이 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머나, 어머나."
대경실색한 김희선의 비명이 울렸으므로 장미는 전화기를 귀에서 멀찍이 떼어냈다.
거짓말이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김희선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정신이 났다.
"너, 정말이야? 거기가 어떻게 아픈데? 증상이 어때? 냄새가 나?"
악 쓰듯 김희선이 물었으므로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뗐어도 다 들렸다.
소파 앞 탁자에 두 다리를 올려놓은 장미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느덧 마음을 정한 것이다.
"아줌마, 10억 내라고 해. 백퍼센트 처녀라고 강조하고 말이야."
"10억, 100퍼센트 처녀."
복창하고 난 김희선이 또 물었다.
"너, 거기 증말 괜찮은거야?"
"괜찮아."
"병원 안가도 돼?"
"글쎄, 장난친 거야."
"이 망할 년."
잇사이로 말한 김희선이 화를 삭이려는 듯이 3초쯤 가만 있다가 말을 이었다.
"한여사한테 10퍼센트 줘야 되는거 알지? 대신 내 몫은 5퍼센트로 하고."
"10억에 1억5천이 나가네. 그럼."
"우리가 어떻게든 10억은 맞춰볼게."
"몸 좀 만들게 사흘쯤 시간을 줘."
"알았다."
"그리고."
잠깐 망설였던 장미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놈 끝나면 다른 놈도 알아봐. 요즘은 잡념 생기지 않게 일해야겠어."
강한이 10억원을 이춘식의 계좌로 송금한지 30분쯤 지났을 때 이번엔 전화가 먼저 걸려왔다.
이춘식이다.
"오후 10시경에 외곽순환도로 시흥영업소 앞에 흰색 뉴랜드가 주차하고 있을거야.
뒷좌석에 조재일이 눕혀져 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춘식이 말을 이었다.
"내 부하 둘이 데리고 나갔지만 차 밖으로 나가 있을테니까 손대지마."
"아니, 그럼…."
이맛살을 찌푸린 강한이 휴대폰을 고쳐쥐었다.
"그놈들도 눈치채고 있단 말이야?"
"난 최광규처럼 독식하지 않아."
이춘식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두 놈은 내 심복이고 그놈들한테 네가 말한 조건을 다 말해줬어.
둘은 이번 일로 각각 3억씩 받지."
"일 한 대가 치고는 엄청 받는데."
"다른 애들도 나눠줄 거야."
"그럼 내가 준 몫으론 부족하지. 최광규 금고를 털어야하지 않겠어?"
"모레 밤이 어때?"
"어디서 말이야?"
"허드슨 빌라."
"또?"
그러자 이춘식이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주차장에서 기다리면 돼."
"내가 말이야?"
"넌 내 차 트렁크에 숨어 먼저 주차장에 와서 기다리는 거지."
"얼씨구."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옆에 앉은 유기호를 보았다.
잠자코 듣던 유기호도 얼굴을 펴고는 소리없이 웃었다.
"날 트렁크에 싣고 간다구?
아예 그대로 최광규한테 갖다 바치지 그러냐?
그럼 아무리 빈대같은 최광규라도 몇억은 줄텐데,
그리고 날 족치면 몇백억이 쉽게 나올지도 모르고."
"그 방법 뿐이야."
이춘식의 목소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네가 날 믿어야 하겠지."
"어쨌든 오늘 밤 10시에 조재일을 찾고나서 널 믿을 수 있는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지."
"찾고나서 잔금은 틀림없지?"
"20억."
"그래, 최광규 건을 승낙한다면 나머지 20억도 보낼거냐?"
"그래야지."
"좋아."
전화기에다 한숨소리까지 뱉은 이춘식이 말을 이었다.
"찾아가라."
그리고는 통화가 끊겼으므로 강한이 유기호를 보았다.
그러자 유기호가 강한의 표정만 읽고 대답했다.
"조재일이를 찾고나서 다시 생각해 보지요. 저도 긴가민가 합니다."
오후 5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둘은 일산 시내의 널찍한 공원 주차장 안에 세워둔 차 안에 앉아 있었는데 주위 경관이 좋았다.
오후에 운동을 나온 남녀가 호숫가 길을 활기찬 모습으로 걷고 뛰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강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일이를 찾아도 당분간은 요양시켜야 할 겁니다. 아직 움직이지도 못한다니까요."
"백용철이까지 그렇게 되었으니 이젠…."
말을 그친 유기호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이제 본래의 행동대는 천상태 하나만 남았다.
유기호는 자문 역이지 몸으로 뛰는 팀원이 아니었고 거기에다 천상태도
지난 번 최광규한테 잡혔다가 빼내온 후부터 달라졌다.
내색은 안했지만 겁이 많아진 것 같았고 행동이 느려졌다.
후유증이 있는 것이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이젠 나 혼자 남은 꼴이군요."
"요즘은 머리로 싸웁니다. 그리고…."
유기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한을 보았다.
"돈이 가장 강력한 무기죠. 돈이면 어떤 것도 다 삽니다.
우린 지금 최광규의 경호팀장도 돈으로 매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오늘밤 꺾어봐야 알겠지만요."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 겪어봐야 알겠지만 이미 끝장을 보려고 작정은 했다
시흥 영업소 앞 주차장에는 딱 4대의 승용차가 주차돼 있었다.
흰색 뉴랜드는 왼쪽에서 세번째였다.
계단 위 2층짜리 영업소 건물에는 1층만 불이 켜졌고,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사무실에는 직원 두 명만 앉아 있었다.
길가에 차를 세운 유기호가 강한을 보았다.
도로 방향으로 차머리를 두고 있어서 가속기만 밟으면 달려나갈 수 있다.
그러나 영업소 앞에 있는 차량 4대는 모두 전면 주차된 상태라 일단 후진했다가
방향을 잡아야 할테니 몇 초쯤 시간이 더 걸린다.
고속도로에서 몇 초면 몇백 미터 간격으로 벌어질 수 있다.
"돌아온다고 했으니 저쪽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것 같군요."
유기호가 턱으로 영업소 건물 옆 화장실을 가리켰다.
화장실은 크고 깨끗했다.
그러나 안은 이쪽에서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본 강한이 이윽고 밖으로 나왔다.
옆으로 차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거침없이 흰색 뉴랜드로 다가간 강한은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빈 차의 문은 잠기지 않아서 쉽게 열렸는데 뒷좌석에 다리를 굽히고 누워있는 조재일이 보였다.
"야, 재일아!"
강한이 소리쳐 부르자 조재일이 머리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강한은 건물에서 비친 불빛으로 조재일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화단도 없어서 숨을 곳도 없다.
건물과의 거리는 20미터 정도, 건물에서 뛰어나온다고 해도
대여섯 명쯤은 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번에는 가리지 않고 쏴버릴 작정이었다.
강한은 몸을 굽혀 조재일의 다리를 잡고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소리쳤다.
"재일아! 정신차려!"
그러자 조재일이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살려주십쇼, 사람살려!"
그 순간 가슴이 울컥해진 강한이 이를 악물고는 조재일을 안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는 차로 다가가자 유기호가 밖으로 나와 뒷문을 열어 주었다.
뒷좌석에 조재일을 눕히고 나서 허리를 편 강한은 화장실 입구 밖으로 나와 서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불빛을 등에 받고 서 있어서 윤곽이 선명했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가시죠."
유기호가 서두르듯 말했으므로 강한은 차에 올랐다.
다음 순간 차는 맹렬한 속도로 어둠 속을 달려나갔다.
이춘식의 전화가 온 것은 그로부터 10분쯤 지난 후였다.
"유기호하고 둘이 데리러 왔더군. 그 영감태기 쓸만해?"
하고 이춘식이 물었으므로 강한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된거야?"
강한이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외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파이프로 좀 맞았어."
이제는 이춘식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좀 맞아서 그래. 너도 알거야. 우리가 때리는 건 기술자거든."
"이 새끼, 지금 자랑하는 거야?"
버럭 강한이 소리치자 전화기에서 이춘식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리고 넌 어떻게 한 줄 알아? 넷을 병신 만들었어, 인마."
강한은 이를 악물었고 이춘식의 말이 이어졌다.
"자, 나머지 보내야지?"
"좋아, 30분 내로 보낼 테니까 확인하고 다시 연락해."
"그럼 큰일도 추진할 건가?"
이춘식이 묻자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큰일이란 최광규를 제거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제의는 강한이 먼저 했지만 지금은 이춘식이 서두르는 상황이 되었다.
힐끗 옆좌석의 유기호를 본 강한이 입을 열었다.
"먼저 최광규의 동선을 말해. 계획은 내가 세울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지."
이춘식이 선뜻 대답했다.
"하지만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나도 위험해질 테니까 말이야."
거울 앞에 서 있던 장미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으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탁자로 다가간 장미는 휴대폰의 발신자 번호를 보고 나서 귀에 붙였다.
강한이었다.
"왜?"
대뜸 장미가 물었다.
"일은 다 끝낸 거야?"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강한이 묻는 바람에 장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천상태 시켜서 사온 옷 입고 있는 거냐?"
강한이 물었으므로 장미는 다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거울 안에 수녀가 서 있었다.
단정한 수녀복 차림의 장미는 마치 그림 속의 성녀처럼 깨끗했고 아름다웠다.
아침에 천상태를 시켜서 수녀복을 사온 것이다.
그때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너, 벤처 사장 만난다구?"
"다 들었구만, 왜 물어?"
"아니, 그럼."
눈을 치켜떴던 장미가 목소리를 낮췄다.
"아줌마가 만들어 놓았다고 연락 왔는데 그럼 놔두라고 해? 무슨 이유로?"
"……."
"섬에 가서 쉬는 것도 깨졌으니까 일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며칠만이라도 참을 수는 없었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몰라?"
"그럼 난 논다는 거니?"
장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거울 속에 눈을 치켜뜬 수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라구, 너만큼 말이야."
"그래?"
강한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긴장한 장미에게 강한이 차분하게 말했다.
"좋아, 해라. 하지만 기다려. 내가 그놈에 대해서 알아볼 때까지."
"그럴 필요까지는…."
"그렇게 급하니?"
"뭐가?"
"그거 하는 거 말이야."
"야, 이 새꺄."
다시 거울속의 수녀가 눈을 치켜떴다.
얼굴까지 상기된 수녀가 거울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내가 그 짓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럼 뭐냐?"
"개같은 놈."
"네가 그런 것 같은데."
"전화 끊어."
"내가 김마담한테 내 조사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어, 그러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누구 맘대로?"
장미가 쏘아붙였지만 강한은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소파위로 내동댕이친 장미가 거울속의 수녀를 쏘아 보았다.
"개자식."
그때 응접실로 천상태가 들어섰으므로 장미는 몸을 돌렸다.
천상태는 통화 내용을 다 들은 것 같았다.
아래층 면적이 50평이나 됐지만 집 안에는 둘 뿐인데다 잡음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거시기…."
천상태가 장미 옆 얼굴에 대고 입을 뗐다.
"형님이 지시가 있을 때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시끄러!"
앞에다 대고 소리친 장미가 창가로 다가가 섰다.
그리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걸치고 있던 수녀복을 거칠게 벗어던졌다.
"지시? 웃기고 있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장미는 앞으로 꼼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시를 받은 천상태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리창에 이마를 붙이고선 장미는 눈을 크게 떴다.
그순간 두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뒤에서 부스럭대던 천상태가 현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렸다.
장미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답답해서 그랬다. 외롭기도 했고.
<계속>
'소설방 > 강안여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 생존자 (3) (0) | 2014.07.30 |
---|---|
50. 생존자 (2) (0) | 2014.07.30 |
48. 밤의 전쟁 (5) (0) | 2014.07.30 |
47. 밤의 전쟁 (4) (0) | 2014.07.30 |
46. 밤의 전쟁 (3) (0) | 2014.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