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밤의 전쟁 (5)
"네 명 다 로비에 있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조재일이 강한에게 말했다.
"로비에서 경비원하고 이야기하는 걸 보고 왔는데 지금은 용철이가 감시 중이야."
허드슨 빌라는 경비실이 1층 로비와 현관 입구에, 그리고 주차장 입구 두 곳에도 있다.
그리고 로비에서 손님이 오래 머물 수도 없다.
최광규의 부하 넷은 곧 밖으로 나가든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든지 해야 한다.
탁자 위에 펼쳐놓은 빌라 청사진을 내려다보던 강한이 머리를 들었다.
"4803호실은?"
"방의 불은 켜져 있던데."
"차라리 그게 낫지."
머리를 끄덕인 강한이 청사진의 한쪽을 짚었다.
"일 끝나면 이쪽 통로로 해서 로비로 나가라구. 그럼 CCTV 두 개만 거치게 돼."
"조금 돌아야겠군."
"10분 내에 끝내자구. 현관 경비가 로비를 자주 찾았고 순찰 경비가 돌아다닌단 말이야."
"도대체 이놈의 빌라는 경비가 몇 명이야?"
조재일이 투덜대자 강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밤 경비는 4개 팀 12명이다. 단위 면적당 경비원 수로는 청와대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으므로 강한이 서둘러 귀에 붙였다.
로비 위쪽 3층의 야외 정원에서 경비실을 감시하던 백용철이다.
"형, 네 놈이 로비를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건물 안에는 최광규 한 놈 뿐입니다."
"좋아, 거기서 기다려."
심호흡을 한 강한이 옆에 선 조재일을 보았다.
"우리 셋이 오늘 처리하기로 하자."
"좋아."
눈을 치켜뜬 조재일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놈하고 나하고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할 사이다. 나도."
강한이 옆에 놓인 배낭을 집어들고는 안에서 소음기가 끼워진 권총을 꺼내 쥐었다.
놀란 조재일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강한이 탄창을 꺼내 실탄을 확인하고는 다시 끼웠다.
"베레타야, 탄창에 15발 들었고."
"든든하겠군."
"최악의 경우에 사용 할거야."
셔츠를 젖혀 올리고 권총을 혁대 사이에 꽂은 강한이 배낭에서
검은색 마스크와 장갑을 꺼내 조재일에게 건네주었다.
"자, 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야외 정원에 나왔을 때 어둠속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용철이 다가와 보고했다.
"그동안 현관 경비가 로비 경비한테 다녀갔어요."
머리를 끄덕인 강한이 배낭에서 경비원 제복을 꺼내자 백용철과 조재일은
서둘러 옷을 겹쳐 입었다.
강한도 제복을 입고나서 모자까지 썼다.
그러자 순식간에 경비원으로 변했다.
손에 장갑까지 낀 강한이 빈 배낭을 옆쪽 쓰레기통에 넣고는 그늘 밖으로 나왔다.
셋이 계단을 통해 로비 뒤쪽 입구로 나왔을 때 경비는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호흡을 한 강한이 경비의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세걸음 쯤의 거리로 가까워졌을 때 경비가 머리를 돌려 강한을 보았다.
40대 중반 쯤의 경비는 얼굴에 웃음을 띄었다가 곧 이맛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 누구시던가?"
같은 경비원 제복이었으므로 눈을 가늘게 뜬 경비가 강한의 이름표를 보았다.
그때 강한이 뒤쪽 혁대에 찔러넣은 권총을 꺼내 경비에게 겨누었다.
"가만 있으면 아저씨 안다쳐."
"어? 너, 누구야?"
경비는 권총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버럭 소리친 경비가 벌떡 일어섰을 때
강한은 권총을 휘둘러 경비의 관자놀이를 쳤다.
4803호실의 버튼을 누르자 곧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네, 무슨 일이죠?"
"여기 로비 경비인데요."
강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현관 보안장치 점검을 하려고 합니다. 사모님, 10초면 됩니다."
"그래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알았어요."
통화가 끊겼을 때 강한이 백용철을 보았다.
"넌 숨어서 상황을 보고해."
"알았습니다."
백용철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비 안쪽의 상황실에는 건물 안에 깔린 수십개 CCTV 화면을 감시하는 경비가 있다.
로비 경비를 묶어 처박고 난 강한과 조재일은 이번에는 상황실로 쳐들어가
그곳에 있던 경비를 잡아 묶어서 옆쪽 비품실에 가둬놓았다.
그래서 로비에 남은 백용철은 로비 경비원 자리와 상황실 양쪽이 보이는 위치에서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간 강한과 조재일도 주머니에 넣어둔 마스크를 썼다.
엘리베이터 안의 CCTV에 얼굴이 다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리자 둘은 각각 마스크를 쓴 채로 올라 48층 버튼을 눌렀다.
상황실 경비를 묶어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비상벨이 울렸을 것이다.
고속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48층에 멈춰섰고 둘은 4803호실 앞에 섰다.
이 엘리베이터는 2호실과 3호실 전용이다. 문 앞에서 마스크를 벗고 벨을 눌렀을 때
곧 고리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벨을 누른 순간 집안의 모니터 화면에 문밖의 장면이 뜨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문을 열어준 30대 초반쯤의 여자에게 머리를 숙여보인 강한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조재일이 뒤를 따랐다.
"잠깐 보안장치를."
하면서 강한이 주위를 둘러본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고 강한은 눈을 부릅떴다.
정면으로 보이는 응접실 소파에 세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베란다쪽에도 두 사내가 서 있다. 그때였다.
"아앗! 저놈, 강한이다!"
벼락같은 소리가 베란다쪽 사내한테서 터져 나왔다.
그러자 왼쪽 방 안에서도 세 사내가 뛰어 나왔다.
"아앗!"
뒤에서 조재일의 놀란 외침이 울린 순간 강한은 허리춤에 꽂은 권총을 뽑아 쥐었다.
눈을 치켜뜨고 이를 악물었다.
"이런, 시발놈들 좀 봐."
그러나 쏟아지듯 몰려오는 사내들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잡아! 잡아라!"
집안에서 아우성이 일어났다.
"퍽! 퍽! 퍽!"
강한은 세 발을 쏘았다. 아우성 속에서도 둔탁한 총성이 울렸고 덮치듯
달려오던 두 사내가 바로 앞에서 엎어졌다.
"퍽! 퍽!"
다시 두 발을 쏘았을 때 사내 하나가 쓰러지면서 다른 사내에게 강한은 어깨를 잡혔다.
그 순간 주먹이 날아와 머리를 쳤고 앞으로 세 사내가 또 덮쳐왔다.
"퍽! 퍽!"
다시 두발. 그때 뒤쪽 문이 열리면서 조재일이 소리쳤다.
"뛰어!"
강한은 목을 감아 쥐는 사내의 머리를 이마로 받으면서 겨우 문 밖으로 나왔다.
조재일이 기다리고 있다가 손에 쥐고있던 대검을 휘둘러 사내 하나의 어깨를 찔렀다.
"아아악!"
복도에서 커다란 비명이 울렸다.
"저쪽으로!"
강한이 비상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권총을 겨눠 바로 앞으로 다가선 사내의 다리를 향해 또 쏘았다.
"퍽!"
"아이고오!"
또 비명과 함께 악을 쓰는 외침이 일어났다.
'함정이다!'
계단을 달려 내려가면서 강한은 이를 악물었다.
조재일은 비상구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놈들한테 잡혔다.
4803호는 최광규의 집이 아니라 경호원 대기실이었다.
경호원들의 숫자는 10명도 넘었다.
강한은 그 중 대여섯을 총으로 쏴 넘어뜨렸지만 비상구 앞에 섰을 때 총탄은 이미 바닥나 있었다.
강한은 지금 21층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중이다.
48층에서 한참 달려 내려왔지만 아직도 20층이나 남았다.
강한은 달려 내려가면서 다시 손에 쥐고있던 휴대폰의 단축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호음만 울릴 뿐 받지 않는다. 백용철의 휴대폰이었다.
백용철도 당한 것 같았다.
15층에서 옆 동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통로가 있었지만 강한은 그냥 달려 내려갔다.
백용철까지 잡혔다면 통로 입구에 감시요원을 배치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했으므로 강한은 달리는 속도를 늦췄다.
발신자 표시에 백용철의 이름과 번호가 떠 있었다.
서둘러 휴대폰을 켜고 귀에 붙였을 때 백용철의 목소리가 울렸다.
"형, 난 지금 길 건너편에 있어."
백용철이 가쁜 숨을 뱉었다.
"놈들한테 당했어."
"나도 당했다."
한걸음에 다섯 계단씩 뛰어 내려가던 강한이 문득 10층에서 발을 멈췄다.
그리고는 헐떡이며 물었다.
"유선생은?"
"지금 나하고 같이 있어."
"좋아, 넌 유선생하고 먼저 이곳을 빠져나가."
강한이 말했다.
"나는 알아서 나갈 테니까."
그 순간이었다.
위쪽 비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은 위로! 너희들은 날 따라와!"
사내의 외침소리가 쩌렁이며 울렸으므로 강한은 다시 뛰어 내려갔다.
사내들과는 2개층 간격이었다.
단숨에 3층까지 내려온 강한은 비상구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복도 끝으로 달려가 유리 창문을 밀었다.
창문이 열리면서 바깥바람이 휘몰아쳐 들어왔다.
창문은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
상반신부터 내민 강한이 창틀을 잡고나서 하반신을 빼냈다.
그리고는 창문을 밖에서 닫고난 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깊은 밤이어서 바닥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뭇가지가 발끝에 닿을락 말락 했다.
심호흡을 한 강한은 두 팔을 벌리고 몸을 날렸다.
정원수 가지가 두 손에 잡혔다가 중량을 못이겨 찢어지면서 몸이 떨어지자
다시 다른 가지를 잡았다.
이번에는 가지가 견뎌 주었다. 온몸에 땀으로 범벅이 됐으므로 강한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손등으로 눈 주위의 땀을 닦았다.
그러자 주위 윤곽이 드러났다.
이곳은 빌라 옆의 정원이다. 출입구는 반대쪽이다.
나무에서 뛰어내린 강한은 길을 가로질러 샛길로 들어섰다.
그때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꺼내쥔 강한은 길을 건너면서 발신자를 확인했다.
조재일이다.
이를 악문 강한이 휴대폰을 켜 귀에 붙이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 놈을 어떻게 해줄까?"
그리고는 사내가 낮게 웃었다.
"네놈이 총질을 해서 둘이 중상이고 둘은 병신이 될 것 같아. 이 원수를 이 놈한테 갚아줄까?"
"너 누구냐?"
호흡을 가눈 강한이 길가의 자판기 구석에 몸을 붙이고 섰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이름만 대봐. 네 집구석을 찾아가게 말이야."
"끝까지 입은 살아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내의 굳은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조재일이 살리고 싶으면 이 전화로 연락해. 협상하자 이거야."
사내가 말하자 강한은 이를 악물었다가 풀었다.
"조재일이한테 손대면 앞으론 아예 다 죽일 거야. 머리에다 대고 쏠테니까."
백용철은 살아서 빠져나왔지만 머리가 터졌고 등은 칼로 찔렸다.
그 와중에도 셋을 쓰러뜨렸으니 대단한 놈이다.
최광규는 철저하게 경비 체계를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행동도 빨랐다.
4703호실 바로 위층인 4803호를 경호원 대기실로 만들어 놓았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기에다 강한이 4803호에서 경호원들과 맞부딪친지 1분도 되지 않아 로비로 놈들이 몰려왔다.
놈들은 이쪽 행동을 훤하게 꿰고 있었다.
백용철은 길 건너편에서 지원하던 유기호 쪽으로 도망쳤는데 강한과 연락을 하고 나서
정신을 잃었다.
참담한 결과였다.
조재일이 잡혔기 때문에 당장 폐쇄되어야 할 거처가 세 곳이 됐다.
장미도 그날 밤중에 거처를 옮겨야만 했고 여수 앞바다의 섬으로 휴양을 떠날 계획도 취소했다.
고문을 이겨낼 장사는 없는 것이다.
지난번 황택수가 잡힌 뒤부터 강한은 은신처 위치를 혼자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안가는 안심해도 괜찮았다.
다음날 아침 강한이 수원 교외의 은신처로 들어섰을 때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던 장미가 물었다.
"왜 넷이 나갔다가 혼자 돌아와?"
주방 쪽에 서 있던 천상태는 눈만 치켜뜨고 몸을 굳혔다.
장미는 알면서도 묻는 것이다.
강한이 장미 앞자리에 앉아 길게 숨을 뱉었다.
백용철은 유기호와 함께 원주 근처의 개인 병원으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당분간 치료를 받아야만 한다.
정색한 장미가 강한을 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뭘 말이야?"
겨우 강한이 묻자 장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대로 있을거야?"
강한의 시선을 받은 장미가 뱉듯이 물었다.
"이렇게 끝낼거냐구. 병신같이."
그 순간 꼿꼿이 있던 강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내 실수였어."
이제는 장미가 눈만 깜박였고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끝장을 내야겠다."
"어떻게?"
"최광규를 만날 거야."
"웃기네."
혀를 찬 장미가 쓴웃음을 지었다.
"영화를 찍으려고?"
"없앤다는 말이야."
강한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다 드러나겠지만 할 수 없어."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장미가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므로 강한은 길게 숨을 뱉었다.
주방에 서 있던 천상태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장미가 형 걱정 많이했어."
천상태가 낮게 말했다.
오전 7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젯밤 연락을 받은 천상태는 자고 있던 장미를 깨워 짐을 꾸렸는데
이번에도 옷가지와 귀금속만 챙겨 나왔다.
두시간 전에 이곳에 도착했으므로 장미도 잠 한숨 자지 못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길게 숨을 내뱉은 강한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해."
"형, 어떻게 하려고?"
천상태가 묻자 강한은 어금니를 물었다.
"오늘 밤에 끝낼거야."
"어, 어떻게?"
"그건 네가 알 필요없어."
잇사이로 말한 강한이 똑바로 천상태를 보았다.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건 염려말고."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강한이 힐끗 안방을 보고 난 뒤 말했다.
"난 지금 나간다."
"장미하고 이야기나 좀…."
하고 천상태가 말리는 시늉을 했으므로 강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식이 별걸 다 걱정하네."
강한이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때 따라나온 천상태가 길게 숨을 뱉고나서 말했다.
"형, 몸 조심해. 장미 생각을 해서라도."
"이런 병신들, 그걸 놓치다니."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최광규가 씩씩거리다가 물잔을 들고 서너 차례 들이켰다.
급하게 마시는 바람에 턱밑으로 물이 흘러내렸다.
4703호실 안이다. 응접실에는 이춘식을 중심으로 대여섯 명의 경호팀 간부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풀이 죽어 있다.
그 중 두 명은 머리와 팔에 붕대까지 감아서 패잔병 꼴이었다.
그때 이춘식이 입을 열었다.
"조재일이는 어떻게 할까요? 아직 정신이 들지는 않았습니다만."
"머릿속에 든 건 다 게워내게 해."
최광규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아주 정신병자로 만들어 놔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춘식이 다시 머리를 들고 최광규를 보았다.
"조재일이 휴대폰으로 강한이하고 연락될지도 모릅니다. 회장님."
"강한이가 협상에 응할 것 같나?"
최광규가 눈을 치켜뜨고 묻더니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안 할거다. 그리고 그 놈은 전화도 꺼놓았을 거다. 위치 추적을 피하려고 말이야. 놔둬."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인 이춘식이 부하들에게 눈짓을 하고는 4703호실을 나왔다.
오전 8시였다.
어젯밤 그 소동이 일어났지만 빌라는 조용했다.
바로 위층인 4803호 바깥 복도에 어지럽게 뿌려졌던 핏자국은 즉시 깨끗하게 닦였고,
부상당한 부하들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시발, 다친 애들 어떻게 됐느냐고 한마디도 묻지 않는구만."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이춘식이 잇사이로 말했다.
주위에 선 부하들은 입을 다물었고 다시 이춘식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에 울렸다.
"중환자실에 둘이나 있는데 말이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춘식이 로비를 걷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주머니에는 휴대폰이 두 개 들어 있었으므로 꺼내본 이춘식의 표정이 굳었다.
조재일의 휴대폰이었던 것이다.
발신자 번호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걸음을 늦춘 이춘식이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누구야?"
대뜸 그렇게 묻자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강한이다. 넌 누구냐?"
쓴웃음을 지은 이춘식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에 7, 8명의 부하가 따르고 있었지만 강한의 전화라는 건 모르는 눈치였다.
심호흡을 한 이춘식이 말했다.
"난 이춘식이다. 말해라."
"이춘식이라면 경호팀장이군."
강한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론만 말해주지. 네가 조재일이를 풀어 준다면 20억을 내지. 네 계좌로 비밀리에 보내주겠다."
"흐응."
코웃음을 친 이춘식이 현관의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 다가와 멈춰 섰으나 이춘식은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부하들과의 간격이 생겼다.
부하들이 차를 타려고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때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최광규하고 같이 있어서 대답하기 곤란한가?"
"아냐, 혼자 있다."
이춘식이 낮게 말했을 때 강한의 말에 열기가 실렸다.
"난 이미 멀리 떨어져 있어.
조재일이 고문해봐야 날 잡지 못한다.
걔가 아는 정보는 한계가 있으니까. 너나 챙겨."
"……."
"20억이다. 어때?"
"생각해 보지."
잇사이로 말한 이춘식이 차에 오르면서 말을 이었다.
"한 시간 후에 연락해."
"알았다."
차에 오른 이춘식이 앞에 앉은 부하에게 말했다.
"조재일이 깨어났나 확인해 봐."
그리고는 덧붙였다.
"우리가 갈 때까지 손대지 말라고 해."
이춘식은 지금 조재일한테 가는 중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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