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47. 밤의 전쟁 (4)

오늘의 쉼터 2014. 7. 30. 10:42

47. 밤의 전쟁 (4)

 

 

 

 

저녁 7시가 됐을 때 중식당 안쪽의 작은 방 안으로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여덟살짜리

사내아이의 손을 쥔 30대 중반의 여자가 들어섰다.

"아이구, 형수님."

기다리고 있던 강한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를 맞았다.

여자는 일주일 전에 사망한 박용수 형사의 부인 양선옥이다.

강한과는 서너 번 만난 적이 있는데다 남편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

양선옥은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따라온 사내아이가 엄마의 우는 모습을 보더니 시무룩해졌다.

자리를 권하자 양선옥이 업었던 아이를 풀어 오른쪽에 앉혔고 사내아이는 왼쪽 의자에

스스로 앉았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병원에 못 갔습니다."

강한이 탁자 위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그래서 형수님을 잠깐 이곳에서 뵈려고…."

그때 종업원이 들어섰으므로 강한은 양선옥의 주문대로 자장면을 시켰다.

자장면 넷에다 탕수육을 추가하고 나서 종업원을 내보냈을 때 방안엔 아이 둘이

수선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세살짜리가 방안을 돌아다녔고 여덟살짜리 오빠가 뒤를 따르면서 놀았기 때문이다.

사내아이는 어느덧 제 동생과 노느라고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저기."

헛기침을 한 강한이 입을 열자 양선옥이 시선을 들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맑았다.

울어서 눈이 충혈되었고 눈 언저리가 부었다.

선한 인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다.

박용수는 양선옥을 사랑하지만 무뚝뚝한 성품이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강한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박용수는 화장돼 유골만 남았다.

뺑소니에 치인 이틀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사망한 것이다.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사시는 연립이 전세라고 들었는데 옮기셔야죠?"

그러자 양선옥은 어깨만 늘어뜨렸다.

대책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퇴직금 등으로 나온 돈은 3000만원도 채 안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다.

그때 강한이 말했다.

"제가 경기도 고양시에 35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형수님 이름으로 사 놓았습니다.

신축 아파트니까 내일이라도 옮겨가 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강한이 의자 밑에 내려놓은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양선옥 앞에 놓았다.

"제가 형수님 등본 떼어다가 다 수속 끝냈습니다.

봉투안에 권리증, 인감, 등기부등본에다 확인증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양선옥은 눈만 크게 뜨고 봉투와 강한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아이들이 옆쪽에서 깔깔거렸다.

세살짜리 여동생이 웃자 오빠가 따라 웃는다.

그때 강한이 봉투 하나를 더 꺼내어 다시 양선옥 앞에 놓았다.

"이건 고양시 번화가에 있는 상가 두개의 권리증입니다.

20평짜리 두 개인데 이것도 형수님 이름으로 매입했습니다.

지금 피자집하고 옷가게를 하고 있는데 한달에 두 곳 임대료로 500만원이 나올 겁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더 오른다는군요."

양선옥의 얼굴이 이제는 하얘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입이 열렸다.

"왜 이렇게…."

"제가 형님한테 신세를 많이 졌기 때문이지요."

그 순간 강한은 이를 악물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눈을 부릅뜬 강한이 똑바로 양선옥을 보았다.

"형님은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손등으로 눈물을 닦은 강한이 잇사이로 말했다.

"제 일을 봐 주시다가 뺑소니를 당한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말을 꺼냈다가 양선옥도 따라 울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양선옥이 소리내 울었으므로 놀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강한은 양선옥의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었다.

 

 

 

 

차가 빌라 건너편 길가에 멈추자 강한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반이다. 양선옥을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 오느라 늦었다.

"너, 돌아가."

강한이 말하자 운전석에 앉은 백용철이 백미러를 보았다.

"형, 내일 돌아올 거야?"

"그럴 것 같다."

"조심해, 형."

"걱정 말고."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차에서 내리자 백용철의 차는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본 강한은 길을 가로질렀다.

이곳은 차량 통행이 뜸한 주택가인데다 늦은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도 드물었다.

2층짜리 빌라 사이로 난 샛길을 지나 205동 앞에 선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1층 3호가 윤명심의 집이다.

이 30평형 빌라도 강한이 윤명심에게 사주었다.

본래 채권 회수팀장과 채무자로 만난 사이였지만 윤명심의 사는 모습을 보고 나서

강한이 보호자가 돼버렸다.

강한은 윤명심에게 빌라뿐만 아니라 18평짜리 가게 하나까지 사주었다.

윤명심은 천호동 가게에서 나오는 월 2백만원의 임대료만 가지고도

딸 윤지와 고생하지 않고 살만 하다.

문 앞으로 다가간 강한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안의 잠금장치는 풀어놓아서 문은 소리없이 열렸고 깨끗한 집 안이 드러났다.

그때 막 신발을 벗으려던 강한이 숨을 죽였다.

안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 죽어."

윤명심이 뱉는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발밑을 보았다.

그러자 윤명심과 윤지의 신발 옆에 놓인 남자의 구두가 보였다.

"자기야."

다시 윤명심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나 죽어!"

하고 윤명심이 악을 쓰듯 소리친 순간 남자의 숨이 끊어지는 듯한 신음이 이어졌다.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구두를 신은 채 곧장 안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방의 불을 환하게 켜놓은 상태여서 두 짐승의 엉킨 뒷모습이 환하게 드러났다.

남자는 윤명심 위에 아직도 엎어져 있었고 윤명심의 팔다리가 마치 낙지처럼 붙어 있다.

둘은 아직도 이쪽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가쁜 숨에 섞여 앓는 소리까지 내는 중이다.

강한은 뒤쪽 혁대에 꽂은 권총을 꺼내 쥐었다.

최광규와 전쟁을 시작한 후부터 호신용으로 갖고 다녔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은 없다.

권총의 안전 장치를 확인한 강한은 총신을 움켜쥐고 다가가 사내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무겁고 굵은 신음소리가 울렸다.

강한이 다시 한번 내려치자 피가 튀기면서 사내는 폐 안에 남은 숨을 길게 뱉어내더니

그대로 엎어졌다.

"아악!"

그때야 윤명심이 비명을 질렀다.

윤명심이 늘어진 사내를 밀어젖히고는 알몸을 드러내며 일어나 앉았다.

두 눈을 치켜뜨고 머리는 헝클어져서 마치 미친 여자 같았다.

"아냐, 아냐, 제발…."

윤명심이 강한이 쥔 권총을 보더니 손까지 흔들면서 더듬댔다.

입가에 금방 거품이 맺혔다.

그때 사내가 앓는 소리를 뱉더니 꿈틀거리다가 늘어졌다.

사내의 뒤통수에서 흘러내린 피가 흰 침대시트를 적시고 있다.

"조용히 해."

강한이 권총을 다시 혁대에 꽂으면서 말했다.

"윤지 깨겠다."

"저기, 처음이야. 이 남자는."

하고 윤명심이 더듬거렸을 때 강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놈 조용히 시키려고 이런 거야. 그리고 변명할 것 없어."

그리고는 정색했다.

"잘 살아. 윤지 교육 잘 시키고. 이놈이 착하면 같이 살아도 돼. 난 떠날 테니까."

 

 

"기다리셨죠?"

다가선 양민정의 얼굴은 밝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두 눈과 웃음을 머금은 입술을 보자 강한은 따라 웃었다.

양민정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다.

강한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집에 안들어가도 되니?"

"이 시간에 불러내놓고 마음에도 없는 말 마세요."

활짝 웃은 양민정이 강한의 팔짱을 끼었다.

밤 11시반이 넘은 시간이다.

더구나 이곳은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바라보이는 휴게소였다.

이미 타고왔던 택시를 돌려보낸 터라 양민정은 돌아갈 차편도 없다.

강한이 발을 떼면서 말했다.

"나하고 여주 별장에 가자."

"그래요, 아무데나."

양민정이 강한의 팔을 더 세게 끼었다.

"그럼 우리 하룻밤 같이 보내는 거네요?"

"그래."

"별장이라고 했어요?"

"그래, 산속 별장이야."

"야, 신난다."

대절시킨 택시로 다가간 강한은 양민정과 뒷자석에 올랐다.

미리 행선지를 말해준터라 중년 운전사는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갑자기 웬일이세요?"

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했을 때 양민정이 바짝 붙어 앉으면서 속삭이듯 물었다.

겪을수록 양민정은 애교가 많았고 붙임성있는 성격이었다.

지난번에 실버타운 예정지의 바위위에서 양민정을 안았을 때가 다시 떠올랐으므로

강한의 몸이 뜨거워졌다.

오늘밤은 윤명심과 함께 있으려고 했던 강한이다.

그러나 윤명심은 두달 가깝게 연락을 끊었더니 그 사이에 남자를 만들어 놓았다.

강한은 윤명심이 남자하고 엉켜있는 장면을 보았어도 큰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신감이 잠깐 들었다가 지워졌을 뿐이다.

윤명심의 빌라를 나왔을 때는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한 느낌까지 들었다.

양민정이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강한이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

"믿을게요."

양민정이 앉은 채로 다시 팔을 끼었다.

"실버타운 공사는 다음주부터 시작해요. 알고 계시죠?"

"연락받았어."

"오소장님은 잠도 사무실에서 주무세요."

"그런 분 만나서 다행이야."

"오소장님은 사장님을 얼마나 좋아하신다구요."

"됐어."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팔을 뻗어 양민정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양민정에게서 사과향같은 체취가 풍겼다.

강한은 양민정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안다면 어떤 표정이 될까 궁금해졌다.

그때 양민정이 손을 뻗어 강한의 허벅지 위를 쓸었다.

"저, 달아 올랐어요."

양민정이 강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방금 톨게이트를 통과한 택시는 속력을 내는 중이었다.

강한의 시선을 받은 양민정은 눈을 올려뜨고 웃었다.

차 안은 어두웠지만 밖에서 반사되는 불빛에 양민정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참아, 한 시간만."

강한이 양민정의 귀에 대고 말하고는 귓볼을 입술로 물었다가 떼었다.

"경험도 없는 놈이 보채기는."

"저, 잘 못해요?"

놀란 듯 양민정이 정색하고 강한을 보았다.

강한의 가슴에 기대고있던 상체도 반쯤 일으켰다.

"응, 별로야."

"난 좋았는데."

"글쎄, 너만 좋으면 뭘해?"

"에이."

상체를 반듯이 세운 양민정이 붙였던 몸도 뗐다.

얼굴도 굳어 있다.

강한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양민정을 향해 뜨거운 느낌이 가슴에서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욕정일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는 장미 뿐이다.

그러나 장미에게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대타가 필요하다.

욕정의 상대일지라도.

 

 

 

 

 

 

양민정은 긴장한 탓인지 굳어진 몸이 잘 풀리지 않았다.

택시에서 강한이 한 말 때문이다.

둘이 알몸이 돼 같이 샤워를 하고 침대로 들어왔어도 양민정은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강한은 서둘지 않았다.

천하의 '명기' 장미까지 넉다운 시킨 자신이 아닌가.

섹스 테크닉에 대해서 특별히 교육받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체득했다. 그것은 바로 인내였다. 쉽게 말해서 참는 것이다.

자기 쾌락을 참으면 그만큼 상대방의 쾌락이 증가한다.

그 증거가 바로 장미와의 섹스였다.

그 법칙은 양민정에게도 적용됐다.

강한의 끈질긴 애무가 계속되었고 마침내 양민정의 방어망은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양민정이 이제는 강한의 어깨를 끌어당기면서 소리치며 졸라댔다.

 더 뜨거운 것을 갈망하고 있다.

여주 산속의 별장은 조용했다.

민가와 1Km나 떨어져 있는 터라 악을 써도 들리지 않는다.

이윽고 둘의 몸이 하나가 되었을 때 양민정은 소리 높여 탄성을 내뱉었다.

강한한테서 들은 말은 까맣게 잊었다.

체위를 여러 번 바꾸었고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응접실로 기어 나왔다가

소파 위까지 올라온 후에 마침내 강한은 폭발했다.

그동안 양민정은 셀 수도 없을만큼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강한의 움직임이 멈췄을 때는 숨이 막혀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몸을 뗀 강한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양민정은 그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여전히 거칠게 숨을 뱉는다.

앓는 소리까지 섞여 있다.

양민정의 옆에 앉은 강한이 입을 열었다.

"양민정씨는 1백억대 자금 입출금을 맡는 위치인데도 월급 명세를 보면 150만원 수준이더군."

양민정의 앓는 소리가 약해졌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오소장님한테서 양민정씨는 내가 직접 관리하게 됐다는 이야기 들었지?"

그때서야 겨우 눈을 뜬 양민정이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힘들게 시트를 당겨 아랫도리만 덮었다.

강한이 드러난 양민정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다음 주부터 자금 입출이 많아질 거야.

그때는 내가 자주 연락을 할테니까."

"오소장님이 사장님 결재 받고 자금을 집행하라고 하셨어요."

양민정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실수하면 안된다고."

강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곧 1백억대 공사가 시작된다.

눈 부릅뜨고 관리하지 않으면 자금이 줄줄 새어 나간다.

오성열 소장은 평생 노인복지사업만 해온 사회운동가였고 양민정은 말할 것도 없다.

그때 양민정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더니 시트로 휘감은 채 욕실로 걸어갔다.

벽시계가 새벽 2시반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강한의 머리는 맑았다.

양민정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강한은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손에 술잔을 쥐었다.

"내일 늦게 출근해도 되니까 한잔 할래?"

강한이 묻자 양민정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양민정도 욕실 가운 차림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은 어둠에 덮인 베란다쪽 창밖을 보면서 위스키를 마셨다.

"그럼 이번달부터 사장님이 제 월급 주시는 거죠?"

한모금 위스키를 삼킨 양민정이 물었다.

이제 얼굴은 맑고 두눈이 또렸해졌다.

양민정의 시선을 받은 강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늘 양민정을 불러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물론 오성열을 믿지만 자금 입출을 맡은 양민정을 확실하게 심복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 양민정씨는 내 심복이야."

"월급은 얼마 주시는데요?"

"이건 나하고 양민정씨 둘만 아는 사실로 하고…."

정색한 강한이 말을 이었다.

"연봉 6천에 30평짜리 아파트 한채, 그리고 중형차 한대를 주지."

 

 

 

 

 

 

 

허드슨 빌라는 강남 최고가 아파트로 언론에 대서특필된 곳이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구경하러 상경하는 바람에 아파트

가격이 내려갔다는 소문이 났다.

이번에 강한이 구입한 4005호는 40층에 있어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한강 좌우로 뻗은 강북 강변도로와 올림픽도로는 차량의 붉은색 미등으로 꽉 메워져

있어서 마치 용암 줄기 같았다.

"으음, 좋구나."

베란다에 선 백용철이 한숨과 함께 말하더니 옆의 조재일을 보았다.

"형, 하지만 꼭 이런데서 살 필요는 없잖여?"

"누가 뭐래?"

쓴웃음을 지은 조재일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11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50평형 집 안에는 지금 강한까지 셋이 모여 있었는데 최광규의 애인은 47층 03호에서 산다.

03호는 65평형으로 엘리베이터가 다르고 출구도 다르다.

그러나 같은 아파트 안이어서 통행 제한은 없다.

다른 출구로 나가 엘리베이터를 바꿔 타면 된다.

백용철과 조재일이 응접실로 들어왔을 때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있던 강한이 말했다.

"오늘은 들어오지 않을 모양이다."

"잘 됐네요. 그럼."

백용철이 대뜸 말을 받았다.

"지난번처럼 기집애나 데려갑시다."

지난번 한미연을 데려간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의 시선을 받은 강한이 머리를 저었다.

"목표는 최광규야. 기다려."

그러자 조재일이 거들었다.

"이런 기회를 최광규 애인이나 잡자고 날려버릴순 없지."

최광규가 4703호실에 묵는다면 지금까지 어떤 경우보다 가능성이 커진다.

소파에 앉은 강한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 놈을 잡아서 경찰에 넘기거나 증거를 확보할 필요는 없어."

조재일과 백용철은 다시 입을 다물었고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쓰레기를 이 세상에서 없애는 거야.

다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면 된다."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둘은 눈만 끔벅였다.

그때 탁자위에 놓인 휴대폰이 진동을 했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강한이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예, 유선생님."

유기호였다. 그러자 유기호가 말했다.

"A차고에 벤츠 600이 들어갑니다.

최광규 차 같습니다."

긴장한 강한의 귀에 다시 유기호의 말이 이어졌다.

"앞뒤로 승합차 경호를 받고 있는 걸 보면 틀림없습니다."

귀에서 휴대폰을 뗀 강한이 조재일과 백용철에게 말했다.

"최광규가 A차고로 들어갔다."

그 순간 긴장하고 있던 둘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제각기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는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강한이 다시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유기호에게 말했다.

"거기서 대기하세요."

"예, 보스."

확실하게 대답한 유기호가 전화를 끊었다.

유기호는 지금 허드슨 빌라 건너편의 빌딩 10층 사무실에서 이쪽을 보는 중이었다.

유기호는 창가에 망원렌즈가 달린 사제 저격총을 거치해 놓았는데

그 총으로 300m 거리에서 열 번을 쏘면 아홉번을 명중시키는 실력이었다.

그런데 사무실 창가에서 빌라 현관까지의 직선거리는 100m도 되지 않는다.

다시 휴대폰이 울렸으므로 강한은 긴장했다.

이번에는 백용철이다.

"보스, 최광규는 부하 넷을 데리고 있습니다."

백용철의 목소리가 생기에 넘쳤다.

"넷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그놈들까지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야."

잇사이로 말한 강한이 벽시계를 보았다.

밤 12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다려, 시간은 우리편이야."

오늘 당장 서둘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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