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42. 대작전 (4)

오늘의 쉼터 2014. 7. 29. 10:41

 

  42. 대작전 (4)

 

 

 

실버타운 예정지는 지방도로에서 300m쯤 벗어난 곳의 임야와 골짜기,

작은 산까지 포함된 25만평 규모였다.

예정지 복판으로 폭 20m 정도의 작은 강줄기가 흘렀고

강가에는 갈대 숲이 펼쳐져 있어서 경관이 좋았다.

임야에 대여섯채의 농가가 띄엄띄엄 있었지만 모두 폐농하고 떠난 빈집이었다.

골짜기에서 바로 앞쪽의 갈대숲을 내려다보고 앉은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맑은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숨을 쉰다는 느낌이 왔다.

그러고보면 도시에 있을 때는 숨을 쉬지않고 배터리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은 문득 실버타운이 건설되면 이곳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버지와 강민의 유골도 가져와 함께 지내리라.

인간은 아무리 기를 쓰고 살아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 죽음을 여유롭게, 차분하게 이곳에서 맞는 것이다.

"아유 힘들어."

옆에서 양민정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민정이 손에 가방을 쥐고 바위를 건너오는 중이었다.

100m쯤 떨어진 샛길에다 세워놓은 차에 갔다가 오는 길이다.

양민정에게 다가간 강한이 꽤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커피 넣은 보온병이 무거워요."

양민정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가방 안에는 둘의 점심 도시락이 들어있는 것이다.

평평한 바위위에 앉은 둘은 도시락을 먹었다.

양민정이 집에서 만들어 온 김밥은 맛이 없었지만 닭튀김과 돼지 갈비는 일품이었다.

초가을 날씨는 맑고 선선했다.

흐르는 강물 표면이 햇살을 받고 반짝였으며 가끔 스치는 바람이 갈대밭을 흔들고 지나갔다.

주위는 조용했다.

차 소리도 인적도 없다. 강한에게 물병을 건네주면서 양민정이 말했다.

"소장님하고 여기 왔을 때 문득 남자하고 둘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한이 두 다리를 뻗고는 바위에 등을 붙였다.

조금 전에 강한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강한에게는 분명한 대상이 있다.

장미다.

장미하고 이렇게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모금 물을 삼킨 양민정이 말을 이었다.

"그 대상이 누군지 아세요?"

긴장한 강한이 양민정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강한은 머리를 저어 보였지만 초조해졌다.

그때 양민정이 말을 이었다.

"사장님이죠."

짐작은 했지만 강한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환경은 분위기를 만든다.

양민정은 용모나 성품, 어느 한 부분도 뒤지지 않는 여자다.

성적 매력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여자들과 양민정은 다르다.

잠깐 정적이 흘렀고 그것이 양민정을 초조하고 무안하게 만든 것 같다.

강한의 반응이 냉담하다고 느낀 때문일 것이다.

"놀라셨어요?"

눈 밑이 빨개진 양민정이 그렇게 물었다.

말 끝도 떨렸다.

그러자 강한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오히려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양민정이 100억을 내놓고 벤츠 500을 타는 물질에 끌린 것은 당연하다.

맨몸인 강한에게는 다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터무니없는 욕심이다.

정신병자 수준이다.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응하자고 강한은 생각했다.

3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동안에 강한은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양민정의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았고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나도 민정씨하고 이렇게 둘이 있어서 좋아."

강한이 지금까지 성씨까지 붙여서 양민정씨로 불렀다가 이름만 부른 효과가 났다.

양민정이 눈을 크게 떴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난 민정씨 첫 인상부터 참 좋았어."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써먹고 내려온 대사지만 시작은 다 같다.

근사하고 멋진 단어는 소설이나 드라마 작가가 고심끝에 만들어낸 것일 뿐 현실은 다르다.

 

 

 

 

 

강한은 손을 뻗어 양민정의 어깨를 쥐었다.

이미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양민정이 시선을 내렸을 때 강한은 허리를 당겨 안았다.

물병이 넘어졌다.

강한은 양민정의 몸을 끌어안고 상반신을 비스듬히 눕혔다.

이제 양민정은 강한의 무릎 위에 상반신이 눕혀있는 자세가 되었다.

강한의 내려다보는 시선을 받고 양민정은 눈을 감았다.

그때 강한이 물었다.

"괜찮아?"

양민정이 보일듯 말듯 머리를 끄덕였지만 안고있던 팔에는 분명한 반응이 왔다.

강한은 머리를 숙여 양민정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에서 금방 먹은 귤 맛이 났다.

이윽고 입술이 열리더니 양민정의 혀가 뱀처럼 꿈틀대며 빠져나왔다.

강한이 혀를 빨아들였을 때 양민정이 두 팔로 목을 감았다.

잠깐 입을 뗀 양민정이 거칠게 숨을 뱉었다.

"괜찮겠어?"

강한이 또 물었을 때 양민정은 이번에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양민정도 알고 있는 것이다.

한낮이다.

태양은 환하게 비쳤고 푸른 하늘에는 흰구름 몇 조각만 떠있을 뿐 맑았다.

강한이 양민정의 바지를 벗기고 팬티를 끌어내리자 하체는 금방 알몸이 되었다.

강한은 도시락을 펴놓은 깔판 위에 양민정의 몸을 눕히고 서둘러 바지를 벗었다.

서늘한 바람이 엉덩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한이 양민정의 몸 위로 오르자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팔이 뻗어나와 어깨를 쥐었다.

강한은 곧 양민정의 몸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양민정이 강한의 어깨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아앗"

탄성이 골짜기를 울렸고 갈대숲이 흔들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강한은 양민정의 온몸이 뜨거워져 있는 것을 알았다.

샘은 이미 넘치고 있었다.

강한은 양민정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그러자 양민정이 강한의 목을 감아 안았고, 골짜기가 울리는 탄성이 이어졌다.

거칠게 호흡할수록 폐에 차는 공기는 더 시리게 느껴졌다.

세상 속에 인간은 딱 둘이 남은 느낌이 들었다.

바람이 가끔 드러난 피부를 훑었고 탄성과 호흡소리 외에 갈대숲이 흔들리는 소리만 날 뿐

둘의 세상이었다.

그것을 양민정도 느꼈던 것 같다.

마음껏 탄성을 뱉었고 흐느껴 울었으며 이윽고 절정에 올랐다.

너무 뜨겁고 격렬했기 때문이었는지 양민정이 늘어지는 바람에 강한이 뒷수습을 했다.

어질러진 점심 도시락을 정리하고 양민정의 바지를 챙겨 입힌 강한이 아래쪽 갈대숲 가에서

씻고 나왔다.

그때서야 양민정이 바위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받지 않는다.

"좋았지?"

아래쪽에서 강한이 소리쳐 묻자 양민정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아마 골짜기 위쪽에 있던 짐승들이 다 도망갔을 거다."

그러자 양민정이 아예 돌아앉았다.

"겁나서 다시는 이쪽으로 안올 거야."

그때 양민정이 머리를 돌려 강한을 내려다 보았다.

10여m 떨어져 있었지만 번들거리는 눈과 꾹 다문 입술까지 선명하게 보였다.

"좋았어요."

양민정이 똑바로 강한을 보면서 늦은 대답을 했다.

"너무 좋아서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앞으로 더 좋을 거야."

웃음 띤 얼굴로 강한이 말했을 때 양민정은 머리를 저었다.

여전히 정색한 얼굴이다.

"아뇨, 오늘같은 기회는 더 이상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왜?"

그러자 자리에서 일어선 양민정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오늘처럼 분위기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사장님이 원하시면 먼저 절 찾으세요."

"그렇군."

따라 웃은 강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깔끔하다.

그리고 자존심도 있다.

결코 매달리지 않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로이 피터슨은 50대 후반이었지만 숱이 많은 잿빛 머리에 건장한 체격,

팽팽한 피부를 보면 열살은 더 젊게 보였다.

전용기인 보잉 767기는 지금 태평양 상공을 나는 중이다.

피터슨은 바의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보드카를 마시는 버릇이 있다.

"누구라고 했지?"

술잔을 든 피터슨이 불쑥 물었지만 켐벨은 알아 들었다.

그러나 금방 알아들은 척을 하면 피터슨이 찜찜해한다.

특히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그럴 확률이 높다.

"뭐 말입니까?"

켐벨이 묻자 피터슨은 한 모금 보드카를 삼켰다.

"한국 여자 말이야."

"아."

머리를 끄덕인 켐벨이 정색했다.

"장미라고 했습니다."

"모델이라며?"

"예, 보스."

"좀 비싸지 않아? 할리우드 스타급 가격인데 말이야."

"스페셜이랍니다."

쓴웃음을 지은 켐벨이 말을 이었다.

이런 대화는 피터슨이 좋아하는 것이다.

"바바라가 자기 명예를 걸고 추천한다고 했습니다."

"바바라의 명예?"

다시 보드카를 삼킨 피터슨이 코웃음을 쳤다.

"그 명예 가치가 5달러쯤 될까? 빌어먹을 뚜쟁이 같으니."

"지난 번 일본 게이샤의 실패를 만회하겠다고 했습니다. 보스."

작년말 바바라는 일본에 들른 피터슨에게 게이샤를 소개했다.

수백년 전통, 장관급만 상대하는 특급 게이샤, 춤과 노래가 빼어난데다

침실 매너까지 갖췄다는 게이샤를 3박4일에 150만달러로 합의를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피터슨은 첫날 밤을 다 보내지도 않고 게이샤를 내보냈다.

첫 인상부터 밀가루 통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화장을 보고 질색을 한데다가

가무는 하품만 나왔고 결정적으로 침대에서 실망했기 때문이다.

미인이긴 했지만 모처럼 동양 여자와 즐기겠다는 피터슨의 기대는 깨졌다.

그래서 바바라하고 일년쯤 거래를 끊었다가 이번에 다시 엮어진 것이다.

바바라가 동양쪽에 인연이 많이 닿아 있는 것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보스, 공항에서 호텔로 가시면 대일건설 회장 미스터 유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켐벨이 화제를 돌렸다.

"다음 날 오전 10시는 형도건설 회장 미스터 리하고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오후에는 국동건설 미스터 강인가?"

"예, 보스."

"도대체 내 자유시간은 언제야?"

"그것은…."

외면했던 켐벨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델은 안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거리라는데 아무래도 헬기보다는 차를 이용하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도 파파라치가 따라붙지는 않겠지?"

그러자 켐벨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여기서는 파파라치가 대놓고 따르지 못합니다. 경찰이 당장에 잡아 가니까요."

"마음에 드는군."

머리를 끄덕인 피터슨이 정색하고 켐벨을 보았다.

"켐벨, 그 별장 구조가 어때?"

"제가 전송해온 사진으로 보았더니 숲속 별장입니다.

2층 본관은 방이 8개이고 고용원 숙소도 있어서 저희 수행원 25명이 충분히 투숙할 수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렌트 비용을 낸다고 했더니 최고급 별장을 빌린 겁니다."

"좋아."

피터슨이 결심한 듯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럼 그 별장에서 건설회사 고위층을 만나기로 하지, 공항에서 곧장 그 안가로 직행하면 되겠다."

그리고는 웃음 띤 얼굴로 덧붙였다.

"건설회사 고위층더러 별장에 올 때 조심하라고 해. 언론에 걸리지 않도록 말이야."

 

 

 

 

"2시간 후면 도착한다는데."

통화를 끝낸 김희선이 앞쪽에 앉은 강한과 장미를 번갈아 보았다.

오전 11시 반, 2층 응접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정원의 마른 잔디 위를

까치 두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잘 다듬은 잔디는 마치 고른 모래밭 같다.

김희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들이 경찰이나 되는 것처럼 위세를 부리는구만. 이곳 위치를 비밀로 하래."

2시간 후 별장에 도착한다는 무리는 피터슨이 고용한 한국 측 경비회사 직원들이다.

피터슨은 8시간 후에야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것이다.

"피터슨이 올 때까지 난 여기 있겠지만 강사장은 어떻게 할테야?"

김희선이 묻자 강한은 정원에서 시선을 뗐다.

"피터슨이 오기 전에 돌아가야죠."

"경비회사 사람들은 만날거야?"

"난 모델 장미의 매니저니까요."

"말 되네."

다시 김희선이 쓴웃음을 지었을 때 소파에 등을 깊게 묻고 있던 장미가 김희선에게 물었다.

"그럼 그 작자가 여기서 계속 있는 거야?"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다는구나 글쎄."

"난 2박 3일에 100만 달러 맞지?"

"그것이…."

눈을 가늘게 뜬 김희선이 장미를 보았다.

"맞긴 맞는데 더 데리고 있겠다면 더 받아내야겠지?"

"누구 맘대로?"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문 김희선이 라이터를 뒤적거리고 찾다가 강한을 보았다.

입맛을 다신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장미의 가방을 나꿔챘다.

그리고는 금방 가방 안에서 라이터를 찾아내 김희선의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피터슨이 여기서 건설회사 관계자들을 만날 계획인 거야."

장미의 옆에 선 채로 강한이 말했다.

그때 김희선이 뱉은 담배 연기가 강한의 허리에 부딪치더니 윗쪽으로 몸을 타고 올랐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될 수 있는 한 네가 옆에 있는 것이 우리 일에 도움이 되겠다."

"누구 일?"

눈썹을 찌푸린 장미가 되묻자 강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일 말이야."

"무슨 말이야?"

긴장한 김희선이 끼어들었다.

"피터슨을 김명준이처럼 다루려고 그래? 그러다가 큰일 나려구."

"아줌마."

장미가 먼저 김희선의 말을 잘랐고 강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 없습니다."

"우리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데?"

여전히 근심스런 표정으로 김희선이 강한에게 물었다.

힐끗 장미에게 시선을 준 강한이 대답했다.

"피터슨의 건설회사 선정에 장미가 도움을 줄지도 모릅니다."

"어, 어떻게?"

"그건 아줌마가 상관 안해도 돼."

다시 장미가 나섰는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아줌마, 내가 침대 일만 하는 것이 좀 불쌍하지도 않아?"

"그, 그건…."

갑자기 김희선이 말을 더듬더니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멋적고 아니라고 한다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때 장미가 말을 이었다.

"나도 머리 좀 쓰는 일을 해보려고 해.

그렇다고 사기를 치는 건 아니니까 아줌마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러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아줌마, 더 이상 묻지마."

"알았다."

김희선이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 장미가 정색했다.

"어쨌든 아줌마는 계산이나 확실하게 해줘.

그 놈이 날 계속 데리고 있겠다면 3일간 100만 달러 외에 하루 추가될 때마다 일당 50만 달러,

수표는 받지 않을테니까 바로 현금을 입금 시키도록 해 줘."

 

 

 

 

피터슨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장미는 전조등을 켠 차량 대열이 다가오는 것을 2층 베란다에 서서 내려다 보았다.

피터슨은 공항에서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장미는 몸을 돌렸다.

한국 경비회사 직원이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랍니다."

사내가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터슨씨는 아래층에서 잠깐 회의를 하고 나서 올라오시겠답니다."

장미가 머리만 끄덕이자 사내는 소리없이 물러갔다.

대기업 회장이 가족 전체가 모여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별장이어서

고용원 숙소도 따로 있었고 창고에다 어린이 놀이터까지 만들어 놓았지만

그 대기업은 몇 년 전에 부도가 나서 분해되었다.

2층 면적만 해도 100평 가까웠는데

이곳은 오직 피터슨과 장미 둘 만의 공간으로 지정되었다.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은 장미가 이제는 부산해진 정원을 다시 보았다.

차들은 이미 도착했고 피터슨과 수행원들은 아래층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김희선은 아래층에 내려가 있었는데 피터슨의 보좌관 켐벨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장미는 정원 옆쪽 주차장에 나란히 주차된 차량을 세어 보았다.

모두 12대였다.

한국 경비회사 직원이 타고온 차는 승합차까지 포함해서 3대,

나머지는 피터슨과 일행이 타고 왔다.

지금도 1t짜리 냉장 트럭에서 서너명이 뭔가를 운반하고 있다.

수행원에 요리사까지 포함되어 있다더니 식품인 것 같았다.

"여기 있군."

갑자기 뒷쪽에서 들리는 영어에 장미가 놀라 일어섰다.

몸을 돌린 장미는 앞에 서있는 서양인을 보았다.

피터슨이다.

사진에서 본 얼굴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지만 웃는 모습에 호감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장미가 영어로 인사했을 때 다가온 피터슨이 손을 내밀었다.

"사진보다 더 미인이군."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놓으면서 피터슨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피터슨씨. 당시도 사진보다 더 멋있어요."

"영어가 유창하군."

"너무 칭찬만 하시면 안됩니다. 여자가 건방져지거든요."

"그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건 상식이죠."

"좋은 걸 배웠어."

피터슨이 장미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걸치더니 안쪽 소파로 안내했다.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장미는 전혀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파에서 마주보고 앉았을 때 멕시칸으로 보이는 중년 여자가

쟁반에 음료수 잔을 받쳐들고 다가왔다.

"앨리스야, 앞으로 우리 시중을 들어줄 거야."

여자를 소개한 피터슨이 앨리스에게도 말했다.

"앨리스, 이쪽은 장미."

앨리스가 장미를 향해 웃어 보였지만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장미, 정말 실물이 훨씬 아름답구나."

다시 응접실에 둘만 남았을 때 피터슨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널 소개시켜준 바바라가 이번에는 정말 자기 체면을 세운 것 같다."

"실망시켜 드릴까 걱정이 돼요."

"아니, 무슨 실망?"

피터슨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장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절 섹스 파트너로 고용하신거 맞지요?"

"그거야…."

주스잔을 든 피터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밤은 함께 보내야겠지."

"전 섹스가 서툴러요."

그러자 피터슨이 정색하고 장미를 보았다.

"장미, 둘이 호흡이 맞으면 되는거야.

그리고 그 책임은 거의 남자한테 있어.

그러니까 섹스가 서툴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아."

피터슨이 차근차근 말했을 때 장미는 머리를 끄덕였다.

진지한 표정이다.

"그런가요? 이젠 좀 안정이 되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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