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38. 심판자 (5)

오늘의 쉼터 2014. 7. 29. 10:09

 

  38. 심판자 (5)

 

 

 

장미는 아이 넷을 낳겠다는 강한의 말을 듣고나서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강한과 시선도 부딪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끄러워 하거나 피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여전히 당당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와 밥을 먹었으며 냉장고 옆에 서 있는

아무나 큰 소리로 불러서 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래서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백용철 등은 강한과 장미와의 미묘한 관계를 모른다.

물론 그동안 북경장 사건같은 일 때문에 모두 바빴고 다 모이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 모처럼 조재일까지 모여 아래층에서 아침 식사를 마쳤을 때 장미가 불쑥 물었다.

 "뭐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쥐가 곳간 드나들듯이 어젯밤에 왜 그렇게 부산을 떨어?"

"아니, 쥐라니."

하고 백용철이 투덜거렸지만 감히 장미와 시선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조재일은 쓴웃음만 지었고 어젯밤 도망치느라고 고생했던 황택수는 말할 기운도 없는지

눈만 껌벅이고 있다.

"말해봐. 나도 알아야 할 것 아냐?"

"어젯밤 최광규의 차에다 나하고 용철이가 화염병을 던졌어."

강한이 고분고분 말하자 황택수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렇다. 둘은 별도로 최광규의 새로운 정부집 앞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뒤쪽 저택에 숨어 기다리다가 화염병을 던지고는 그대로 도망쳐 나왔다.

최광규에 대한 테러라기보다 경고 또는 위협의 목적으로 던진 화염병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일어난듯 장미의 시선이 강한에게 옮겨졌다.

며칠만이다. 대화도 그렇다.

장미의 시선을 받은 강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차만 태운 것 같아. 우린 그냥 도망나왔거든."

"재미있었겠네."

"재미는 무슨."

듣다 못한 황택수가 눈을 치켜떴다.

"우리가 재미로 일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넌 닥쳐."

차갑게 말을 자른 장미가 강한에게 다시 물었다.

"그, 대평건설 건은 어떻게 되었지?"

"이복만이 고재평한테 공사는 넘겨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는 거야."

강한이 정색하고 대답했으므로 이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제2경부고속도로 공사 구간 중에서 3개 구간 120km를 달라고

대평 고재평 회장이 말했다는군.

곧 정부 발표가 나면 고 회장은 수주 단가에 상관없이 우리한테 100억을 주기로 했어."

"흐응."

장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앞쪽에 앉은 조재일이 장미의 웃는 얼굴을 보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주 정신을 잃은 것처럼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다.

"평균 7초3짜리가 파워는 막강하군."

장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주방에 서있던 천상태도 다 들었다.

황택수와 백용철까지 셋이 한꺼번에 커다랗게 웃었으므로 놀란 조재일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조재일은 영문을 모르는 것이다.

웃지 않는것은 강한도 마찬가지였다.

입맛을 다신 강한이 장미를 보았다.

"고 회장은 이복만한테도 리베이트를 50억 주기로 했어.

물론 이복만은 우리가 고 회장한테 얼마 받는지는 모르지."

"그 여우가 짐작은 하고 있겠지. 우리가 고 회장한테서 받는 거 말야."

웃음 띤 얼굴로 장미가 말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강한을 보았다.

"그래서 이복만이 받는 50억 중에서 얼마 뜯어낼거야?"

"다 뜯어내기엔 좀 박절하고 절반쯤."

"내놓을까?"

"내놓겠지. 하지만 우리한테 뜯길 몫까지 계산해서 고 회장한테 더 뜯어내려고 할거야."

"고속도로가 엉망이 되겠군."

혼잣소리처럼 말한 장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뜯고 뜯기는 세상이야."

그러더니 조재일을 향해 빙굿 웃었다.

조재일을 겨냥하고 일부러 짓는 웃음이다.

 

 

 

 

물론 양민정도 사무실에서 처음 강한을 만났을 때 정신병원에서 도망나온 인간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강한이 10억을 내놓는 것을 보고는 진짜 머리가 돌 뻔했다.

양민정의 23년 인생에서 1000만원권 수표를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 1000만원권 수표가 100장이나 있었던 것이다.

강한의 말대로 은행에 전화를 걸어 수표가 진짜라는 것을 확인했을 때 양민정은 하마터면

오줌을 쌀 뻔했다.

그래서 황급히 화장실에 다녀와야만 했던 것이다.

그 수표를 들고 은행에 입금하러 갈 때의 불안감은 말도 못한다.

수표를 넣은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소장 오성렬의 호위를 받으면서 갔던 것이다.

양민정은 그날부터 알바를 그만 두고 노인복지연구소의 정식 사원이 되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10여번이나 입사시험에 떨어진 후에 시간제 수당을 받고

연구소에 나가면서 틈틈이 알바까지 해서 용돈을 마련했던 양민정이다.

꿈을 실현하게 된 오성렬만 신이 난 것이 아니다.

양민정도 요즘처럼 생의 활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소장님 지방 출장 가셨는데요."

강한이 들어섰을 때 양민정이 거의 울상을 짓고 말한 것도 활력이 넘쳤기 때문일 것이다.

강한이 들어섰을 때부터 양민정의 가슴은 세차게 박동을 했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것을 감추려고 손바닥을 자주 볼에 붙여 열기를 식혔다.

"괜찮아. 알고 온 거야."

낡은 소파에 앉은 강한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오후 2시반이다.

사무실에는 양민정 한 명뿐이었는데 오성렬은 강한의 자금을 받고나서도

양민정의 월급을 정식 사원급으로 인상시킨 것 외에 다른 곳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통장에는 10억이 그대로 있다.

"내가 오 소장님하고 합의를 본건데."

하고 강한이 시선을 주었으므로 양민정은 긴장했다.

두 눈이 번들거렸고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양민정씨가 자금 관리를 하기로 말야."

"네에?"

놀란 양민정이 머리부터 저었다.

몇 백만원 예산일 때 쯤은 속셈으로도 가능했지만 이건 10억이다.

그리고 강한도 100억대 자금을 더 투자한다고 하지 않는가?

"전 능력 없어요. 그건 전문가가 해야."

양민정이 열심히 말했을 때 강한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알아. 자금 운용은 전문가한테 맡길 거야.

하지만 출금은 양민정씨를 통하는 거지."

눈만 크게 뜬 양민정을 향해 강한이 웃어 보였다.

"앞으로 내가 자주 양민정씨를 찾게 될 거야.

입금할 때도 양민정씨한테 할 테니까."

양민정은 이제 시선만 주었다.

앞쪽에 앉은 강한은 이제 양민정에게 신비스런 존재였다.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젯밤에는 강한의 꿈까지 꾸었다.

책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강한이 다가와 껴안았던 것이다.

놀란 양민정은 소리를 지르려다 입만 벌린채 가만 있었다.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때 강한이 손을 뻗어 팬티 속으로 집어넣더니 샘을 만졌다.

그러자 온몸이 뜨거워진 양민정이 눈을 감고는 다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기다리다가 눈을 떴더니 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팬티는 흠뻑 젖었고 샘은 뜨거웠다.

꼭 현실같은 꿈이었다.

그때 강한이 불쑥 물었다.

"양민정씨는 내가 뭐 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네?"

했다가 양민정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랬다.

강한이 10억을 놓고간 후에 양민정과 오성렬이 한 시간이 넘도록 토론한 주제도 그것이었다.

오성렬은 강한이 재벌 2세가 분명하다고 했다.

더우기 때가 묻지않은 재벌 2세라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민정의 생각은 달랐다.

강한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갑자기 유산을 상속 받은 수재가 분명했다.

그때 강한이 다시 물었다.

"내가 재벌 자손처럼 보여?"

 

 

 

 

 

"아뇨."

양민정이 머리를 저었다.

두눈이 반짝였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전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강선생님은, 저기."

말을 멈춘 양민정이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혹시 유산 받으신거 아녜요? 갑자기요."

"왜 그렇게 생각했지?"

강한이 정색하고 물었으므로 양민정은 제 생각이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가슴이 더 뛰었다.

"재벌 2세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리고?"

"강하게 보였거든요."

그러자 강한이 빙그레 웃었다.

"잘 봐줘서 고마워."

"맞아요?"

"아니."

천천히 머리를 저은 강한이 정색했다.

"일본에 외삼촌이 계시는데 내가 대리인 형식으로 복지 사업을 하는거야."

"아아."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인 양민정이 감동했다.

자신의 추측이 오성렬보다는 현실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했다.

"그랬군요."

"그 자금은 결국 일본에 계신 외삼촌의 재산이지."

"훌륭하신 분이세요."

감동한 표정으로 말한 양민정이 강한을 보았다.

"그럼 강선생님은 지금 뭐 하세요?"

"참, 내가 명함 안줬던가?"

"소장님이 받으신 명함에는 전화번호만 적혀 있던데요."

"여기."

하고 강한이 명함을 내밀었으므로 받아든 양민정이 유심히 보았다.

'한신유통 사장 강한'

명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시선을 든 양민정에게 강한이 설명했다.

"자금 관리 회사야.

쉽게 말하면 자금을 유통시켜 불려주는 회사지.

회원은 몇명 안되지만 금액이 커."

"아아."

내용이 아리송했지만 양민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 일을 하려면 자금 유통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강한이 다시 보여졌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부동산이나 주식 또는 채권에 투자해서 매년 결산을 해주지.

난 몇년간 큰 회사에서 일하다가 올해 독립했어."

"그러셨군요."

"나에 대해서 궁금할것 같아서 말해주는거야."

웃음띤 얼굴로 말한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아직 차도 안드셨는데."

당황한 양민정이 말했을 때 강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무실을 나온 강한이 빌딩의 현관 밖으로 나서기 전에 도로를 주의깊게 둘러보았다.

버릇이 된 행동이다.

오늘 노인복지연구소에 들른 이유는 신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명함까지 만들어온 것이다.

아무리 거금을 기부해서 좋은일에 사용한다고 해도 출처가 불분명하거나

범죄가 개입된 자금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성렬과 양민정 등 사무소측이 믿도록 해야만 한다.

밖으로 나온 강한은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차에 타고 나서 건물 2층의 사무소를 올려다 보자

양민정이 창가에 서 있다가 손을 흔들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고선 양민정의 모습이 환했고 웃는 얼굴은 막 피어난 꽃같았다.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난 강한은 길게 숨을 뱉었다.

양민정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은 작년에 군에 자원 입대를 했는데 등록금 마련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식당일과 파출부 일을 하다가 작년 말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는 아직까지 병원을 오가며 요양중이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저렇게 밝고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착한 성품이다.

시트에 등을 붙인 강한은 길게 숨을 뱉었다.

 

 

 

 

 

장미와 강한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희선이 반색을 했다.

커피숍 안에는 손님이 그들뿐이었다.

"아유, 넌 볼 때마다 예뻐지는구나. 사람없는 곳에서 널 만나길 잘 했다."

칭찬이긴 했지만 장미는 쓴웃음을 짓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곳은 홍천 근처의 국도에서도 샛길로 300m 쯤이나 들어간 곳이었다.

그러나 더 안쪽으로 가면 러브호텔에다 식당도 여러 곳이 있다.

장미와 나란히 앉은 강한에게도 김희선이 한 마디 했다.

"도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안 거야? 도둑놈들이 숨어 지내기에 딱 맞겠다."

맞는 말이다.

강한이 대성금융에 다닐 적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때는 돈 떼어먹고 안쪽 러브호텔에 숨어있던 채무자를 찾아냈다.

강한도 쓴웃음만 짓자 멋적어진 김희선이 헛기침을 했다.

"저기, 대평건설 건은 이달말쯤 입금이 될 거야.

어제도 고 회장한테서 연락이 왔어."

강한과 장미를 번갈아 보면서 김희선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갑자기 일이 2건이나 생겼는데

하나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학 교수고, 또 하나는."

힐끗 장미의 눈치를 보고난 김희선이 말을 이었다.

"저기, 알지? 피터슨이라고. 미국의 유명한 억만장자 있지 않어?"

"모르겠는데."

대뜸 장미가 대답하자 김희선이 혀를 찼다.

"넌 신문도 안 보니?

미국에 건물을 수백 채 갖고 있고 세계 갑부 순위로 항상 10위권 안에 드는 사람 말야.

잘 생긴데다가 여자는…."

"밝히겠군."

장미가 말을 자르더니 머리를 저었다.

"관심없어요.

갑부 순위 1등이건 뭐건간에 내 맘이야.

난 서양놈 하고는 안해봤어. 싫어."

"얘는."

이제는 강한의 눈치를 살핀 김희선이 정색하고 말했다.

"서양 놈 그건 별거 있는 줄 알아?

난 안해봤지만 얘들 말 들었더니 흐물흐물 하다더라."

"흐물흐물하건 단단하건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깐 그러네."

장미가 김희선을 쏘아보았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지저분해진단 말예요, 아줌마."

"기본이 100만달러야. 거의 10억이라구."

김희선이 지지 않고 검지를 세워보였다.

이제는 강한의 눈치도 살피지 않는다.

"그거 한번에 10억이란 말이다. 거기에다 틀림없이 팁이 있어."

"아줌마는 입만 몇번 벌리고 1억을 먹네."

"너, 신문도 안봤니?

미국에서 뜨지도 못했던 3류 배우가 피터슨하고 한번 자고나서

500만달러짜리 요트를 선물로 받았다는 이야기 말야."

"그 자식이 배 타고나서 배 주었네."

"네가 안한다면 한다고 나서는 년이 100명도 더 될 거다."

"그년들이나 하라고 해."

그러더니 장미가 정색했다.

"그, 박사 교수라는 작자는 어때?"

"아, 시끄러."

열을 받은 김희선이 눈을 흘기고는 3초쯤 외면했다가 입을 열었다.

"재단이사장 아들. 박사라지만 요즘 하도 가짜가 많아서."

"그 작자도 돈은 좀 있겠네?"

"아, 돈이야 많지."

겨우 생기를 찾은 김희선이 말을 이었다.

"내가 돈 혼자만 먹는게 아냐.

정보원에다 중간에서 연결시키는 년들까지 열 명도 더 고용하고 있다고.

내 몫에서 절반은 그녀들 몫으로 나간단 말야."

"서론 빼고."

장미가 말을 자르자 김희선은 입맛을 다시고 나서 말을 이었다.

"네 이야기 듣더니 홀딱 빠져서 2박3일에 1억 낸다더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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