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심판자 (3)
어느덧 벽시계는 12시가 넘어 있었다.
강한의 시선을 따라 시계를 본 한미연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이제 여섯시간 남았네."
파리행 비행기 출발 시간은 8시 30분이다.
이곳 인천에서 공항까지는 한 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지만 6시에는 출발해야 될 것이었다.
강한이 팔을 뻗어 한미연의 어깨를 안았다.
집안은 조용했다.
2층짜리 고급 빌라단지여서 방음 장치도 잘 되어 있는데다 차량 소음이 적다.
도로와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 일이 해결되면 다시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 서둘지 마."
강한이 말하자 한미연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난 떠나고 싶었어. 아주 오래 전부터"
한미연이 모로 눕더니 손바닥으로 강한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었다.
"자기는 참 좋은 남자야."
쓴웃을을 지은 강한이 한미연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잊어. 쓸데없는 감정 소모시키지 말고."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겠지."
얼굴을 붙인 한미연이 강한의 턱에 입을 맞췄다.
둘의 알몸이 맞닿았고 강한의 굳어진 남성이 한미연의 아랫배를 눌렀다.
"또 해줄 수 있어?"
한미연이 물었으므로 강한은 잠자코 몸을 세웠다.
아직도 조금 전까지 내뿜었던 둘의 열기가 방안에서 빠져 나가지도 않은 상황이다.
"이번은 그냥 해줘요."
한미연이 두 팔로 강한의 목을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불을 다 밝혀놓고 있어서 한미연의 상기된 얼굴과 물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다 드러났다.
강한은 한미연의 몸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아아."
한미연이 마음껏 탄성을 뱉더니 허리를 치켜 들었다.
"자기야, 사랑해."
강한의 몸이 다시 움직인 순간 한미연이 신음과 함께 말했다.
강한은 대답 대신 한미연의 눈에 입술을 붙였다.
한미연의 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을 꿈틀거리면서 빈틈없이 엉켰다가 리듬에 맞춰 떨어졌다.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는 것처럼 신음을 뱉다가 고통을 참을 수 없는 듯이 외치던 한미연이
마침내 온몸을 경직시키면서 폭발했다.
서로의 몸에 익숙해져 있어서 강한도 동시에 폭발했다.
한미연이 한참 동안이나 강한의 몸에 매달리듯 안겨있더니
이윽고 경련을 일으키며 떨어졌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만족감 때문이었지만 이번의 흐느낌은 가장 길었다.
강한은 한미연의 여운이 다 사라질 때까지 부둥켜 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하고 있어."
한참 후에 호흡이 가라앉기 시작한 한미연이 더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한미연은 이제 반말을 섞어 썼는데 자연스러웠다.
의식적이 아닌 증거로 가끔 존대말도 나온다.
강한은 잠자코 한미연의 귀를 입술로 물었다.
그때 한미연의 말이 이어졌다.
"장미씨가 말야."
한미연이 몸을 비트는 시늉을 했으므로 강한은 몸을 굴려 옆에 누웠다.
천장을 향한 채 한미연이 길게 숨을 뱉었다.
"여자는 다 알 수 있어. 둘이 아무리 시치미를 떼도 말야."
"무슨 말야?"
강한이 묻자 한미연이 머리를 돌려 정색하고 강한을 보았다.
"장미씨를 그대로 둘 거야? 언제까지 그런 짓을 하도록 할 거야?"
"그건."
말이 막힌 강한이 시선을 돌렸다.
오늘 저녁, 한미연은 숙소에서 장미와 헤어지면서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둘이 그동안 정이 들어서 그런지 어쩐지 알 수 없었지만
오늘 밤은 둘이 지내라고 권한 것도 장미였다.
그래서 둘은 이곳 인천의 안가로 와 있는 것이다.
그때 한미연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장미씨 좋아하고 있어. 둘은 어쨌든 서로간에 솔직해져야 돼."
오성렬은 사회복지 활동을 하면서 온갖 고난을 겪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적십자사와 몇 개 기관,
그리고 몇백 명밖에 안되는 후원자가 모아준 기금은 월평균 200만원 정도였다.
그래서 요즘은 유급 직원 한 명에 무보수 봉사자 셋을 데리고 무의탁 노인들에게
점심 대주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물론 오성렬의 수당은 없고 종로에 있는 사무실 관리비는 오성렬이 낸다.
정확히 말하면 상계동에서 15년째 문구점을 운영하는 오성렬의 부인 천수자가 내는 셈이다.
말이 문구점이지 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가게에서는 100원짜리 딱지나 풍선을 팔아
저녁 때 결산하려면 동전만 셀 때도 있다.
오성렬이 앞에 앉은 사내를 다시 유심히 보았다.
오전에 난데없이 후원금을 내겠다는 연락을 하더니 찾아온 사내였다.
사무실 안에는 사내와 오성렬 둘뿐이다.
오늘은 토요일이어서 노인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소장님은 이 봉사단체에서 13년째 일을 하고 계시더군요."
하고 사내가 말했으므로 오성렬은 헛기침을 했다.
오성렬의 노인복지연구소는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회만 하면 대표이자 창립자인
오성렬의 기록이 다나온다.
오성렬은 사내가 건성으로 들르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직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이름만 강한이라고 했지 직업도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예, 제가 창립을 했지요. 한때는 회원이 2000명에 회비만 월 500만원이 걷혔습니다만 이제는."
쓴웃음을 지은 오성렬이 사내를 보았다.
"좋은 일 하는 단체가 많아져서요. 우리한테 정부 지원금은 돌아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10년째 꾸준히 용산역, 서울역 앞에서 노인들한테 점심을 제공하셨더군요."
사내가 말하자 오성렬은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이 사내가 내놓을 후원금은 30만원 정도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오성렬의 추측은 거의 맞았다.
백발백중일 때가 많아서 유급직원 양민정은 점쟁이라고까지 했다.
"자금이 더 있다면 무의탁 노인, 병든 노인한테도 식사 배달을 하고 싶었지만 그건 안되더군요."
한가한 시간인데다 사내가 복지연구소의 활동 상황까지 알고 있는 것이 기특했으므로
오성렬의 말이 길어졌다.
"이런 일은 뭘 바라는 마음을 품는다면 오래 못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욕심내지 말고 묵묵히 일해야지요."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은 오성렬은 노인을 부모 모시듯이 했다.
한때 봉사활동에 미친 오성렬을 비난하고 떠났던 와이프도 지금은 이해해준다.
오성렬은 그것이 가장 고마웠다.
그래서 등록회원 375명, 유급직원 한 명으로 노인복지 활동을 하는 단체로는
가장 오래된 단체가 되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양민정이 들어섰다.
"오늘은 가게가 내부 수리하는 바람에 알바 쉬게 되었어요."
밝은 목소리로 말한 양민정이 다가와 물었다.
생머리를 뒤로 묶었고 상큼한 모습이다.
"커피 끊여 드릴까요?"
"커피 남았나?"
오성렬이 묻자 양민정이 손에 쥔 가방을 들어보였다.
"사왔어요."
"고맙죠."
그리고는 오성렬이 강한에게 물었다.
"커피 드릴까요?"
"고맙습니다."
강한이 대답하자 양민정이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계시는 줄 알았는데 손님이 와 계셨네요. 커피 사길 잘 했네."
"후원하겠다고 오신 분이야."
"어머."
놀란 양민정이 다시 다가오더니 강한 앞에 섰다.
머리를 든 강한과 시선이 마주치자 양민정이 활짝 웃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요."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깨끗했다.
서클 렌즈도 끼지 않은 눈이 곱다.
한 모금 커피를 삼킨 강한이 오성렬을 보았다.
시민단체는 수천 개였고 복지활동을 하는 단체만 해도 수백 개가 된다.
강한은 조사담당 천상태를 시켜 드러난 실적은 없더라도 성실한 봉사단체를 찾았고
특히 단체 대표의 뒷조사를 시켰다.
그래서 오성렬을 찾아낸 것이다.
오성렬은 6년쯤 전에 숨은 자선사업가로 언론에 딱 한번 보도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취재팀이 겨우 인터뷰를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사회활동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들과 대조적이었다.
오성렬이 강한의 시선을 받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이쪽에 등을 보인 채 책상에 앉아 있는 양민정도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둘은 강한이 방문한 목적, 즉 후원금을 내는 과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강한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오성렬의 노인복지연구소에 직접 찾아와 성금을 내고 간
후원자는 없다.
등록된 217명의 후원자 중에서 약 50명 정도가 매달 75만원 정도를 기탁했는데
1인당 평균 1만5000원이 된다.
그리고 기업체에서 월평균 70만원, 적십자사에서 60만원 정도가 지급되었던 것이다.
그때 강한이 입을 열었다.
"무의탁 노인, 병든 노인을 위한 타운을 세워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넓은 땅에 아파트를 짓고 병원과 각종 시설을 갖춘 도시가 되는 거죠."
오성렬은 눈만 껌벅였고 귀를 세우고 있던 양민정이 의자를 돌려 강한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강한은 양민정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긴 숨을 뱉는 것을 보았다.
이맛살이 조금 찌푸려져 있는 것이 꼭 불쌍한 장면을 보는 표정이었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멀쩡한 인간이 미쳤구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강한이 말을 이었다.
"충청도 영동이나 옥천, 보은 쪽에 몇십만 평 정도 산야를 사서 건물을 짓는 겁니다.
처음에는 500명쯤으로 시작했다가 5만명 정도로 늘어나면 그야말로 타운이 되겠지요.
노인도시 말입니다. 병원, 학교, 약국, 수퍼마켓은 물론이고 오락시설, 체육시설도 갖춘 도시죠."
"……."
"건강한 노인들은 공장이나 농업 일을 하는 겁니다.
자신의 전문분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를 줘서 생산활동을 하게 하고 보수도 줍니다.
그들은 타운 측에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겠죠."
"잠깐만."
강한의 말을 제지한 오성렬이 먼저 길게 숨부터 뱉었다.
그리고는 눈시울을 무겁게 들어올리고 강한을 보았다.
처음에 후원금 30만원을 기대했지만 지금은 절망감이 덮쳐 아무 생각도 안났다.
겉은 멀쩡한데 미친 놈인 것이다.
말이야 맞다.
근사하다.
그런데 누가 이런 대역사를 일으킨단 말인가?
수백 억이 든다.
정부 예산을 쪼갠다면 모를까 대기업이라도 이런 거금은 내놓지 못한다.
"저기, 제가 좀 바빠서요."
이제 이야기 끝내고 나가달라는 표현이었으므로 강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예 자리를 돌려앉은 양민정도 그런 표정이 되어 있었다.
"제가 타운 위치는 알아 보겠습니다."
다시 강한이 말했으므로 이제는 오성렬이 정색했다.
"다음에 뵙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하고 오성렬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었을 때 강한이 말을 이었다.
"1차 예산은 100억으로 하고 건립추진위원장은 오 소장님이 맡아 주시지요."
"일어나시지요."
자리에서 일어선 오성렬이 이제는 강한을 쏘아보았다.
"내가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당분간 조사비용과 활동비 거기에다 후원금까지 합해서 여기 10억 가져왔습니다."
하고 강한이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탁자위에 놓았다. 꽤 두툼한 봉투였다.
"1000만원짜리 수표 100장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은행에 확인해 보시고 저한테 받았다는 인수증이나 한장 써 주시지요?"
"전화 받았어."
강한이 소파에 앉았을 때 장미가 불쑥 말했다.
오후 6시반. 외출했다 돌아온 강한을 장미가 2층으로 부른 것이다.
이른바 2층 호출로 부르는 인터폰 연락에 이제는 아래층 사내 누구도 투덜대지 않았다.
황택수의 표현대로라면 인이 박힌 것이다.
천상태의 표현은 좀 신랄했다.
아래층 남자들은 모두 졸이 되었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강한의 시선을 받은 장미가 외면한 채 말했다.
"한미연씨 한테서 말야."
"언제?"
정색한 강한이 묻자 장미가 건성으로 펴들고 있던 잡지를 옆에 놓았다.
"두 시간쯤 전에."
"어디서?"
"어디긴 어디야? 파리지."
한미연은 무사히 인천공항을 빠져나가 프랑스행 비행기를 탄 것이다.
그것이 사흘 전이다.
그리고는 장미한테 첫 전화를 했다.
강한의 표정을 본 장미가 입술 끝을 조금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왜? 직접 전화를 받지 못해서 화가 난 거야?"
"뭐라고 그래?"
강한이 되물었으나 장미는 딴소리만 했다.
"괜찮은 여자야, 한미연씨. 그렇지?"
"말하기 싫으면 관 두고."
"한미연씨도 널 좋아하는 것 같고."
그러더니 저 혼자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 이상이지. 눈빛만 봐도 알겠더구만. 더구나 아까 전화하면서는…."
"……."
"전화달라고 하면서 울먹이더라니까."
"……."
"한미연씨 통장에 300만달러 그러니까 30억 가까이 입금시켜 두었다면서?"
"……."
"확인하고 놀랐다는 거야, 너무 많대."
"……."
"직접 전화하고 싶었지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대신 전해달래."
"……."
"사랑한다는 말도."
이건 지어낸 말이 분명했으므로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입을 열었다.
"내일 저녁에 이복만이 대평건설 회장을 만나게 되었어."
이제는 장미가 눈만 크게 떴고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김 마담은 널 이복만한테 상납한 대가로 대평건설 고재평 회장을 이복만한테
소개시킬 예정이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안이한 발상이었어.
며칠 전에 김 마담이 이복만한테 고재평을 언제 만날 거냐고 물으니까
그런 계획이 없다고 한 마디로 거절당했단 말야."
"……."
"네 몸만 바친 거지. 참 넌 이복만한테 껌값은 받았다고 했지?"
"닥쳐 이 새끼야."
"먹고 입만 씻은 거지. 그래서 내가 CD를 보낸 거야.
아마 그 CD를 본 이복만이 오줌을 질질 쌌을걸?"
그러자 장미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나 강한이 끈질기게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이복만한테 전화를 했어.
내일 고재평을 만나라고 말야.
그랬더니 놀라서 말까지 더듬더군."
"……."
"어쨌든 만나게 되었어.
그래서 김 마담한테 내가 만남을 성사시켰다고 말해두었지.
고재평은 단가를 더 올려서 이복만을 밀어 붙인 거야.
내가 김 마담을 통해서 그렇게 하라고 시켰으니까."
"……."
"김 마담이 놀라더군, 무안해하고 말야.
내가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아직 몰라."
"……."
"그래서 이번 이복만 작업에는 김 마담이 3%만 받기로 했어,
본인이 스스로 그렇게만 받겠다고 하더라."
그리고는 강한이 자리에서 일었났다.
"참." 몸을 돌렸던 강한이 머리만 비틀고 장미를 보았다.
"한미연이 그러던데 네가 날 사랑하고 있다고 말야. 그것도 아주 열심히."
"그래?"
장미가 정색하고 되물었으므로 강한은 주춤했다.
다시 머리를 몸 방향으로 돌린 강한이 한 걸음 발을 떼었을 때였다.
"거기 서."
하고 장미가 불렀는데 마치 경찰이 수배자를 세우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러나 강한이 걸음을 멈추더니 아예 몸까지 장미에게로 돌려섰다.
그리고는 똑바로 장미를 보았다.
그때 장미가 물었다.
"넌 어때?"
"뭐가?"
강한이 되묻자 자리에서 일어선 장미가 다가와 앞에 섰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봐. 나에 대한 감정을."
"어이쿠, 이런."
이맛살을 찌푸린 강한이 입맛을 다셨다.
"야, 형사가 취조하는 것 같다.
그런 분위기로 어떤 대답이 나올 것 같으냐?"
"말해. 비겁하게 말 돌리지 말고."
눈을 치켜뜬 장미가 두 팔을 허리에 붙였다.
마치 겁을 주려고 두 날개를 벌린 독수리 같았다.
"자꾸 주변에서 변죽만 올리는 데다가 네가 틱틱거리는 행동이 묘하게 신경을 건드려.
그러니까 이 기회에 결판을 내자구."
장미가 한 마디씩 분명하게 말했다.
말하는 동안에 한 번도 강한한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네 행동 때문에 나도 헷갈려. 그러니까, 그래. 허심탄회하게 네 입장을 밝혀."
"입장?"
"아니, 심정이라고 하자. 이 망할 자식아."
장미가 바락 소리쳤다.
"단어 한 개 갖고 말 비틀지 마. 이 비겁한 자식아!"
목소리가 컸으므로 아래층에 남아있는 천상태는 들었을 것이다.
장미가 바짝 다가섰다.
숨결이 느껴질만한 거리였다.
"말해. 너, 나 어떻게 생각해?
나하고 어떻게 나가고 싶어?
네가 계획한 너하고 나하고의 결말은 뭔데?"
"하나씩 물어봐."
"한 번만 더 그따위로 말 끌었다간 너, 맞을 줄 알아."
장미가 손바닥을 펴더니 들어 보였다.
귀뺨을 치기 좋은 자세였다.
"자, 말해."
장미가 다그쳤을 때 강한이 입을 열었다.
"널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널 좋아했어."
장미는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약 먹이고 돈을 털어갔어도 마찬가지야.
널 잡으면 죽일 것 같이 굴었지만,
천만에 내심정으로는 널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
"……."
"그래서 널 찾은 거야.
그것이 그리움인지 모르겠다.
남들은 다 그것이 너에 대한 증오로 알았지만."
"그만."
손바닥을 쫙 펴서 마치 장풍을 쏟아내려는 자세를 한 장미가 한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눈은 여전히 부릅떴지만 강한의 얼굴에서 옆으로 시선이 비껴나 있었다.
"소름이 끼치니까 그만 입닥쳐."
"아니, 이왕 말 뱉은김에 끝까지."
강한이 장미가 물러난 거리만큼 한 걸음 다가가 섰다.
"또 너하고 어떻게 나가고 싶으냐고 물었지?
우린 동업자 관계야.
네 무기는 네 몸이고 난 관리를 맡았지.
근데 이 시스템이 무너지면 난 네가 도망간다고 본다.
네 자존심이 그냥 나하고 같이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봤지."
"……."
"내 애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말야."
"……."
"마지막으로 너하고의 결말은."
"그만."
했지만 장미의 목소리는 약했다.
시선도 완전히 옆으로 돌려져 있었다.
독수리 날개처럼 펴져 있다.
그때 강한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내 아이를 넷만 낳는거지."
그리고는 강한이 얼른 몸을 돌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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