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4장 한국인(10)
(81) 4장 한국인-19
아침 6시가 되었을 때 서동수는 눈을 떴다.
이제는 저절로 이 시간에 눈이 떠진다.
얼굴만 건성으로 씻고 응접실로 나왔더니 조은희가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탁자에는 중국어 교재가 놓여졌고 김이 오르는 커피잔까지 보였으므로
서동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호강하면서 공부를 하는구먼.” 앞쪽에 앉은 서동수가 중국어로 말하자 조은희도 따라 웃는다. “공부는 억지로 시키면 안 되더군요. 미현이 가르치면서 깨달았어요.” “미현이나 나나 좋은 선생을 만났군.” 한 모금 커피를 삼킨 서동수가 교재를 폈다. 중국어는 한자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배우는 데 약간의 이점은 있다.
그러나 서동수는 아예 처음부터 시작했다.
한 번 몰두하면 한눈을 팔지 않는 서동수다.
매일 한 시간씩 공부하기로 했지만 시간만 나면 예습을 했고 선생이 바로 옆에 있는 터라
말도 안 되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해 쌓는 통에 조은희와 백미현이 항상 깔깔대고 웃었다.
며칠 전부터 집 안에서는 중국어로만 대화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서동수는 손짓 발짓까지
섞어야 했다.
공부를 마쳤을 때는 오전 7시가 조금 넘었다.
서동수가 리모컨으로 TV를 켰을 때 미현이 방에서 나와 중국어로 인사를 한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잘 잤니?” “네, 아저씨.” 조은희는 아침을 준비하느라고 주방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다. 두 모녀와 함께 생활한 지도 한 달이 되어 간다.
이제는 서로 익숙해져서 어색하지가 않다.
등교 준비를 하느라고 미현이 서둘고 있다.
미현은 서동수보다 30분쯤 빨리 나가야 한다.
그래서 아침밥도 먼저 먹을 때가 많다.
“난 오늘은 우유 한 잔만.” TV를 보면서 서동수가 말했다. “미현이만 아침 든든히 먹여서 보내요.” “괜찮겠어요?” 조은희가 묻더니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해장국 끓이려고 하는데.” 물론 둘은 중국어로 말하고 있다. “아니, 오늘은 우유만 먹을래.” “서 선생님 중국어 실력 늘었어요.” 웃음 띤 얼굴로 조은희가 말하자 식탁에 앉으면서 백미현이 거들었다. “그래요. 지금은 잘 하세요.” “정말이라면 두 분 선생 덕분이지.” 다시 TV로 시선을 돌린 서동수가 길게 숨을 뱉는다. 이제는 알 만큼은 알 나이가 되었다.
서울에서 오피스텔을 얻어주었던 정은지에 이어서 이곳의 장연지에 이르기까지
계속 쉼표(,)만 찍고 온 덕분으로 상처를 받지 않았다.
쉼표란 그냥 쉬고 간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 쏟아 붓지 않고 또한 다 바라지 않는다.
너한테는 쉬고 떠날 뿐이다.
그렇게 해야 피차 손해가 적은 것이다.
그렇다. 상처가 곧 손해다.
서동수의 시선이 다시 힐끗 조은희의 뒷모습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씬하면서도 엉덩이가 그야말로 육감적, 나이가 마흔하나이니
서동수보다 일곱 살 연상이지만 그것은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다.
오늘밤이라도 당장 조은희를 방으로 부르면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동안 조은희와 수백 번 마주친 눈빛이 그것을 보증해 주고 있다.
TV에 시선을 둔 채로 서동수는 조은희의 풍만한 알몸을 떠올린다.
그리고 조은희의 꿈틀거리는 몸, 딱 벌린 입과 초점을 잃은 눈,
터져나오는 신음을 상상했다.
내가 초인이냐?
서동수가 제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도닦냐? 위선 부리지 말고, 참을 이유도 없다.
당장에 시작해, 저쪽도 기다리고 있어. |
(82) 4장 한국인-20
공장에서 근무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다는 것을 출근하면서 깨달았다.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동수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화란이 다가와 말했다. 화란은 지금도 영어를 쓴다.
영어를 모르는 현지인 사원을 대할 때는 옆에 통역이 있어 줘야 한다.
서동수의 시선을 받은 화란이 말을 잇는다.
“회의실에 가 있겠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으므로 서동수는 화란의 뒷모습을 보았다. 위로 솟은 단단한 엉덩이가 걸음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저 엉덩이는 쉼표도 아니고 마침표는 더욱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동수가 회의실로 따라 들어선다.
옆쪽에서 이인섭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서동수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았을 때 화란이 조금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저기, 과장님, 내일 시간 있으세요?” “무슨 시간?” 서동수가 영어로 물었더니 화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퇴근 후에요.” “공적인 일인가?” “아닙니다. 사적인 일인데요.” 이제는 화란이 똑바로 서동수를 보았다. “같이 저녁 식사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과장님하고 저하고 둘이서요.”
“그것도 사적으로 말이지?” “그렇습니다.” “화란 씨는 지금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지?” “압니다.” 여기까지 둘의 문답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화란이 재깍재깍 대답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동수가 말문이 막혔다.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리면서 서동수가 과장되게 심호흡을 했다.
“좋아, 그럼 만나기로 하지. 시간과 장소를 정해.” “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감사하다니 그게 무슨 말야?” 이맛살을 찌푸린 서동수가 지그시 화란을 보았다. “화란 씨는 한국 스타일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다시 설명을 하지.” 이제 화란은 시선만 주었고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이렇게 정식으로 사적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그날 밤 둘이 호텔에 가는 것이 그, 중국군도 북한군 도우려고 무더기로 한반도에 투입된 전쟁 말야.”
화란의 눈이 조금 커졌고 서동수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북한이 남침한 전쟁인데 그 전쟁 이후로 생긴 전통이야. 정식으로 만나면 그날 밤 호텔에 가는 것이 말이야.
전쟁으로 수백만이 죽었기 때문에 2세를 생산하려고 그런 전통이 생겼던 것 같다.”
“저, 그럼.”
그때 화란이 정색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서동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의자에 등을 붙인 서동수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손톱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회의실을 울리고 있다.
지난번에 준 3만 위안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짜증이 난 김에 호텔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눈치를 보니
속으로 콧방귀를 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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