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분위기가 되었으니 술맛이 날 리가 있겠는가?
옆에 양귀비가 앉아 있다고 해도 감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 비싼 발렌타인 30년을 반도 못 마시고 아가씨 손목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서동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동수의 지시를 받은 이인섭이 재빠르게 계산을 했으므로 박창호는
똥 밟은 얼굴이 되었다.
아성의 로비로 나온 서동수가 건성으로 박창호와 인사를 마쳤을 때 옆으로
장연지가 다가와 섰다.
가는 눈 속의 눈동자가 반들거리고 있다.
“과장님, 명함 주세요.”
“명함은 왜?”
했지만 서동수가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명함을 받은 장연지가 낮게 말했다.
“오늘밤 전화 드릴게요.”
서동수가 시선을 들었지만 장연지는 몸을 돌렸다.
이인섭이 모셔드리겠다고 해서 둘은 택시에 올랐다.
“과장님, 정말 감사 요청을 하실 겁니까?”
아직도 긴장한 이인섭이 택시가 움직이자마자
물었으므로 서동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빈말하려고 불러낸 줄 아나?”
“회사에서 난리가 날 텐데요.”
“뒤집어지겠지. 이렇게 한번씩 세탁기에 넣고 돌려야 된다고.”
“부장이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심호흡을 한 이인섭이 말을 잇는다.
“진짜 자고 있는 호랑이 코털을 뽑은 셈이 되었습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그 자식이 날 우습게 보았지.
내가 제 놈 머리 꼭대기에 떠 있다는 걸 몰랐어.”
“지금쯤 박창호 보고를 듣고 벌벌 떨고 있을 겁니다.”
“내일 아침에 어떻게 나오는가 보자구.”
의자에 등을 붙인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이야. 난 혼자 안 먹었다구.
담당자한테 맡겨서 리베이트를 걷었고 내 계좌로 온 돈을 공평하게 나눴어.
그리고 내가 다 뒤집어쓴 거야.”
이인섭의 시선을 잡은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내가 오늘 당신을 데리고 간 것도 그것 때문이야.”
“잘 알겠습니다.”
앉은 채로 머리를 숙여 보인 이인섭이 서동수를 보았다.
눈빛에 존경심이 묻혀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당신한테는 피해가 가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도 받은 만큼 주는 성격입니다.”
그러고는 이인섭이 어깨를 부풀렸다.
“한국 회사가 이 따위로 썩었는가 하고 한심할 때가 많았는데
과장님을 만나고나서 마음이 바뀌어진 것 같습니다.”
“이봐, 나도 뇌물 먹고 좌천당한 놈이야.”
쓴웃음을 지은 서동수에게 이인섭이 머리를 젓고 말한다.
“아닙니다. 과장님은 다릅니다.”
어느덧 택시가 아파트 앞에 멈춰 섰으므로 서동수가 내렸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보이고는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때 주머니에 든 핸드폰이 울리자 멈춰 선 서동수가 꺼내 쥐었다.
발신자 번호는 모르는 번호지만 알고 있는 사람도 몇 명 되지 않는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서동수가 응답했을 때 곧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저, 장연지예요. 댁이 어디시죠?”
명함을 달라고 했을 때 예상은 했지만 서동수의 가슴이 뛰었다.
“응, 국제아파트 2동 1502호야.”
“혼자 계시는 거죠?”
“당연하지.”
“제가 12시 반쯤 갈 텐데 기다리실래요?”
“발딱 세워놓고 기다리지.”
그러자 짧은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서동수는 어깨를 펴고 엘리베이터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