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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장 좌천(左遷) [7]

오늘의 쉼터 2014. 7. 25. 17:00

<7> 좌천(左遷)

 

(13) 좌천(左遷)-13 

 

 

 

 

“모릅니다.”

화란이 짧게 영어로 대답했다.
 
시선은 앞쪽을 향한 채로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 순간 서동수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야말로 만리타향으로 유배된 것 같은 자신의 처지를 그때서야 느낀 것이다.

“난 좌천되었어.”

좌천이란 영어가 생각나지 않았으므로 그레이드 다운(grade down)이라고 했다.
 
화란은 잠자코 앞만 보았고 서동수는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제 말을 멈추지 못했다.

“하청공장에서 리베이트를 먹은 것이 발각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전자 영업 팀장이었다가 난데없는 의류사업부 중국 공장 총무과장이 된 거야.”

“…….”

“회사에서는 그렇게 발령을 내면 내가 사표를 낼 줄로 예상했던 것 같아.
 
하지만 난 받아들였지.”

서동수가 머리를 돌려 화란을 보았다.

“왜 받아들였는지 알고 싶지 않아?”

“아뇨.”

화란이 짧게 대답했으므로 서동수는 잠깐 헷갈렸다.
 
자신이 부정형으로 물었을 때 아니라고 했다면 ‘예스’다. 그런데 부정형으로 묻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서동수의 울컥해졌던 가슴이 진정된 것 같다.
 
화란이 한 번도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의자에 등을 붙인 서동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10분쯤 후에 차가 멈출 때까지 서동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멈춘 곳은 고층 아파트 앞이었다.
 
뒤따라온 택시에서 내린 이인섭이 다가서며 말했다.

“과장님은 마침 전망 좋은 15층에 입주하시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고 시설도 훌륭했다.
 
현관에 선 경비에게 중국어로 말한 이인섭이 짐가방을 내리면서 말했다.
“여기선 호텔처럼 임대비를 내고 삽니다.
 
한국에선 전세비라면서 나갈 때 돈을 찾아간다면서요?
 
그건 공짜로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군.”

“공장장님은 80평형, 부장급은 60평형, 그리고 과장급은 40평형입니다.”

“난 30평형인 줄 알았는데 좋군.”

경비까지 나서서 짐을 날라 주었는데 아파트는 방 3개에 거실도 컸다.
 
이인섭 말대로 베란다에서는 앞쪽 평야도 보인다.
 
짐은 옷가지가 담긴 트렁크 4개뿐이어서 이인섭이 두리번거리는 시늉을 하며 묻는다.

“짐이 또 옵니까?”

“아니, 이것뿐이야.”

“그럼….”

“와이프는 서울에 있기로 해서.”

“아, 예.”

아파트 안에는 TV는 물론이고 호텔처럼 침대 시트도 다 덮여져 있는데다
 
전기 밥통에다 주방기구까지 다 갖춰져 있는 것이다.
 
주방을 마른걸레로 닦고 난 화란이 중국어로 이인섭에게 말했다.
 
그러자 머리를 끄덕인 이인섭이 서동수를 보았다.

“오늘 저녁부터 식사를 해드시겠다면 화란이 쌀하고 찬거리를 사오겠다는데요.”

“아니, 됐어.”

쓴웃음을 지은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나가서 사먹겠어. 그럼 회사로 돌아가지. 나는 내일 아침부터 출근을 할 테니까.”

“제가 모시러 오죠.”

자리에서 일어선 이인섭이 말했다.

“8시 출근이니까 7시 반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 고마워. 둘 다.”

이렇게 칭다오의 첫날이 시작되었다.
 
 
 
 
 

(14) 좌천(左遷)-14 

 

 

 

공장장 윤명기는 이사급으로 경력 16년, 42세다.
 
의류사업부에만 근무해서 이사급에 오른 이른바 원조(元祖) 걸레였으므로 낙하산으로
 
내려온 서동수가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더구나 공장장쯤 되면 서동수가 발령받은 이유를 알고 있을 테니
 
이곳이 쓰레기장이냐고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서동수의 인사를 받은 윤명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잘해 보라고.”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무과가 제법 일이 많아.”

“알겠습니다.”

그러자 윤명기가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서동수는 방을 나왔다.
 
그다음에 인사를 간 직속 상관 안명규 업무부장은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인격이었다.
 
안명규가 책상 앞에 선 서동수를 똑바로 보았다.

“뭐, 딴말 않겠어. 업무 파악을 빨리해야 될 거야. 안 되면 피차 곤란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동수가 안명규의 찌푸린 얼굴을 마주 보았다.
 
40세, 경력 18년. 고졸 사원으로 입사해서 군대도 가지 않고 생산파트에서만 근무해 왔다.
 
칭다오 의류공장 설립 시부터 근무한 터줏대감. 이곳에서는 공장장보다 원조(元祖)다.
 
영업부 팀장이었을 때에는 공장장급과 맞먹었는데 이제 부장급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의류사업본부장께 반년 안에 업무 파악을 못하면 그만둔다고 했습니다.”

그순간 안명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의류사업본부장이 누군가? 의류사업의 최고위층이다.
 
허정식 부사장. 바로 허정식 부사장을 만나고 왔다는 말이었다.
 
허정식은 세계 7개 국가에 흩어진 19개 공장을 관리하고 있다.
 
안명규 따위는 지금까지 얼굴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때 안명규가 말했다.

“알았어. 가봐.”

그러더니 덧붙였다.

“내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고.”

감사합니다.”

몸을 돌린 서동수가 어금니를 물었다. 안명규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서동수는 5년쯤 전에 한 번 허정식을 만난 적이 있다.
 
그것은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서다. 지방 고등학교 출신인 서동수는
 
그때 처음으로 허정식을 만났다.
 
동양그룹에 고등학교 동문이 14명뿐이었는데 허정식이 그중 가장 기수도 빠르고
 
고위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고위층이 될수록 학맥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터라
 
허정식은 그후로 일절 동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안명규는 곧 허정식의 뒷조사를 할 것이고 자신과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것이다.
 
그리고 안명규가 허정식에게 자신을 만났느냐고 확인을 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안명규가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라고 한 것은 대번에 기가 꺾였다는 증거다.
 
총무과로 돌아왔더니 이인섭이 직원들을 소개했다.
 
사무실 직원이 8명, 경비실 10명, 전기·기계·설비실이 11명, 식당요원 12명,
 
청소원 8명인 대식구다.
 
총무과 각 파트를 돌면서 인사를 하는 데에 오전 반나절이 걸렸고
 
다른 부서장한테 인사를 다니다 보니까 퇴근시간이 되었다.
 
공장 근로자가 4800명인 것이다.

“과장님, 오늘 회식 장소를 잡았습니다.”

이인섭이 다가와 말했을 때 서동수는 한숨부터 쉬었다.

“아이구, 죽겠네. 이 사람아.”

“각 파트 주임과 부주임만 참석하기로 했고 사무실에서는 저하고 주임급 넷입니다.
 
그래서 총원이 14명입니다.”

정색한 이인섭이 말을 잇는다.

“미리 화란 씨를 보냈습니다.”

화란도 주임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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