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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요하(遼河) 16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4. 19:13

 

제13장 요하(遼河) 16

 

 

 

무사히 요하를 건넌 수군은 이긴 여세를 몰아 맹렬한 기세로 동진을 감행했다.

양광은 9군이 각자 정해진 길로 출발한 뒤에 내외, 전후, 좌우의 6군 친위대를 거느리고

우어위장군 의 뒤를 밟아 양평도로 진군했다.

양평도는 한나라 때 생겨난 옛길이요,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이 진군한 요동도는

그 뒤에 만들어진 새 길로 양쪽이 모두 요동성으로 통했다.

요동성은 과거 한나라 때 양평성(襄平城)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양광이 요동성에 당도해보니

요하의 물길을 따라 세운 거대한 석성은 수십 길 높이로 견고하게 쌓였고,

쇠와 나무로 만든 성문은 철벽처럼 굳게 닫혔으며,

성변에는 물길을 끌어 해자를 깊이 파고 군데군데 목책을 설치해

그 방비가 철옹성과 같았다.

또한 성루에는 돌을 내리는 기구와 석포, 불화살대, 병거 등의 공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휘장과 깃발이 현란하여 제아무리 많은 수의 군사일지언정 좀처럼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양광은 성문의 서편으로 20여 리를 물려 진을 치고 함성과 북을 울리며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그리고 우선 성안으로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고자 했다.

이때 양광의 서찰을 지니고 요동성으로 간 이는 양광의 입 노릇을 해오던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裴矩)였는데,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양광에게 요동 정벌을 부추긴 자로

특히 구변이 좋아 양광이 극히 총애하던 신하였다.

살부의 패륜으로 이미 실덕한 양광이 다시금 전조의 신하들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은

9할이 배구의 세 치 혀 덕분이라 해도 과한 말이 아니었다.

양견을 섬겨오던 배구는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천자가 지녀야 할 만승의 위엄이

오륜(五倫)의 위에 있다는 변설로 양광의 패덕을 변호했고,

그를 만나본 선제의 신하들은 거의 태도를 고쳐 양광에게 허리를 굽혔다.

배구가 양광의 서신을 가지고 요동성으로 가서 성주를 찾으니

고신이 그를 을지문덕 앞으로 데리고 갔다.

문덕은 예를 갖추어 배구를 맞이하고 곧 주위를 물린 채 둘이서만 마주앉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문덕이었다.

“자고로 천자는 하늘에서 내는 법이요,

근년에 수나라 황제께서 천하를 아우른 것도 그 근본이 천심을 따르고 화락과 양육을 중시하는

덕치를 폄에 있다고 들었소.

본시 천자의 마음은 내 땅 남의 땅을 가리지 않고 목숨 가진 것들을 귀하고 불쌍하게 여긴다 하였고,

후한서에도 합포주환(合浦珠還)이라 하여 선정을 베풀면 천하의 백성들은 물론이요,

합포에서 없어졌던 구슬까지 저절로 찾아온다 하였거니와, 나는 과문하여 그런지 창칼로 무장한

대병을 앞세우고 남의 땅을 함부로 침범하는 천자가 있다는 말은 아직 들은 바가 없소.

평소에 나는 마음속으로 수나라 황제를 흠모하고 존경하기를 마치 못에 갇힌 고기가 강을 그리듯,

설산의 초목이 밝고 따사로운 해를 기다리듯 하였는데, 이제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낙담과 실망을 금할 길이 없소이다.”

문덕은 자리에 앉자마자 제법 의미심장한 소리로 먼저 선수를 쳤다.

문덕의 말을 듣는 순간 배구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그는 본래 양광과 마찬가지로 대병을 내기만 하면 고구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거라고 여겼고, 그리하여 손쉽게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던 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적진의 사신이 되어 가는 데도 아무런 두려움과 거리낌이 없었으며,

심지어 대국의 신하로서 소국의 장수를 얕잡아보는 마음마저 없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요동성에서 을지문덕을 맞닥뜨리고 특히 그의 비범한 풍모와 의연한 기개를 대하는 순간

모든 것이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배구라고 무오년 이후 수나라 백관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던 을지문덕의 명성을 모를 턱이 없었다.

게다가 그런 문덕에게서 묘한 말까지 듣게 되자 배구는 스스로 거만한 태도를 삼가며 공손한 말씨로

특유의 변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황제께서는 과연 장군의 말씀대로 국경을 가리지 않고 만물을 애호하사 등극하신 이래로

사방의 제후들이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고 팔방의 신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드디어 오늘과 같이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셨지만 유독 신하된 도리를 기휘하고 번례를 결하며 입조하기를 거역한

사람은 그대의 군주인 고구려왕밖에 없었소.

그럼에도 황제께서는 이를 탓하지 않으시고 옛날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한 일을

예로 드시며 진심으로 복종하기만을 기다리고자 하셨지만 주변의 제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천애지각의 변방에서조차 사신을 서경(대흥)으로 보내어 고구려의 무례함과 불손함을 한목소리로

탄핵하니 어찌 천하의 주인이신 우리 황제께서 뭇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을 외면하실 수가 있었겠소?

하여 군사를 소집하니 자청하여 모여든 이가 백만이요,

그러고도 내심 요동의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할 것을 염려하여 출병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다시 저절로 백만이 더 불어났고, 마지못해 군사를 움직이니 또다시 백만 이상이 보태어져서

지금은 그 숫자가 얼마인지도 모를 공전절후의 대군이 되었소.

민심이 곧 천심이라 하였으니 이 어찌 천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소?”

배구는 수군의 위세를 잔뜩 부풀려 겁을 준 뒤에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탁군을 출발하시며 제장들을 불러 모아 말씀하시기를,

비록 고구려가 무례하고 불손하여 만천하의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요동군공 대원과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몇몇 간신들의 잘못이지 전체 백성들과 신하들의 일치된 뜻은

아닐 거라 하셨소.

따라서 우리 군사들은 요동을 지날 적에 되도록 민가에 피해가 없도록 길을 나누어 연기처럼

지나가라 하셨고, 만일 백성들을 해치거나 살림을 축내는 이가 있으면 엄벌로 다스리겠다 하셨으며,

항복하는 장수나 성주는 후히 대접하고 천자의 신하로 삼아 벼슬과 관작을 내릴 거라고 하셨으니

이 또한 화락과 양육을 중시하는 덕치의 표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내 방금 듣자니 장군께서는 평소 못에 갇힌 고기가 넓은 강을 그리워하듯,

눈 속의 초목이 밝고 따뜻한 해를 기다리듯 우리 황제를 흠모하였다 하셨는데,

마침 황제께서 요동성 문 밖에 행차하여 계시니 성문을 활짝 열고 맞이하신다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황제께서도 을지문덕 장군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배구가 은근한 말로 회유하며 품안에서 양광의 서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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