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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요하(遼河) 18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4. 19:27

 

제13장 요하(遼河) 18

 

 

 

“공이 만일 군사의 숫자로 나를 위협하러 오셨다면 당장 돌아가시오!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 을지문덕이 그런 것으로 겁을 낼 사람은 아니오!”

문덕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바뀌자 배구가 잠시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문덕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런 배구를 향해 근엄하고 냉담한 어조로 말을 분질렀다.

“내가 알기로 황제께서 공을 요동성으로 보낸 뜻은 분명히 달리 있을 것이오.

이번에 수나라의 군대는 정작 창칼을 마주하여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전대미문의 규모와 숫자로써 우리를 위압하는 데 있고,

따라서 진실로 바라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항복과 투항일 것이외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그런데 공이 만일 그러한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나와 허심탄회하게 속엣말을

나눌 만한 사람이라면 나도 남모르게 고민하는 바를 굳이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몇 마디 말을 나눠보니 공은 그럴 만한 재목이 아닌 듯하오.

그러니 어서 돌아가시오!

나는 오직 태어난 나라와 섬기는 주군을 위해 힘과 지략을 다해 싸울 따름이오!”

배구가 보니 젊은 장수 을지문덕의 눈에선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리고 꾹 다문 입술에선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눈치가 비상한 배구가 문덕의 말하는 뜻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가 이내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소리를 낮추어 은근한 말로 속삭였다.

“과연 장군의 날카로운 눈은 피하기가 어렵구려.

내 어찌 장군을 위협하려고 왔겠소?

솔직히 말해 우리 황제께서는 장군의 기상과 용략을 이미 아시고 오래전부터

애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소이다.

속엣말이 있거든 흉금을 터놓고 나하고 얘기를 나눕시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신명을 바쳐 도울 것이요,

황제께 전할 얘기라면 한 마디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해 올리겠소.”

문덕도 그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다시 부드러운 눈빛으로 배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돌연 깊은 한숨을 쉬며 짐짓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실 말씀을 후련히 털어놓으시오, 장군!”

배구가 무릎을 당겨 앉으며 채근하자 문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는 황제께서 탁군을 떠나 요동으로 향한다는 소문을 들을 때부터 어찌하여

위험과 낭비와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그토록 과한 군사를 동원하셨는지,

줄곧 그 까닭에 대해 깊이 생각해왔소.

그리고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이는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규모와 위세로써

항복과 투항을 이끌어내려는 황유(皇猷)의 깊고 높은 배려임을 헤아리게 되었소.

과연 황제께서는 만천하의 주인이시오.

비록 남의 나라 백성일지언정 귀애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으니

능히 덕업(德業)을 닦는 분이라 아니할 수 없소.

본래 장부의 팔복 가운데 그 주인을 잘 만나는 게 으뜸이요,

살아서는 뜻이 같고 죽어서는 같은 전기에 오르는 것이 영예인데,

그런 황제를 가까이서 뫼실 수 있으니 공과 같은 사람이 실로 부럽소.

제비와 기러기는 오고 가는 시기가 달라 만나지 못함을 늘 한탄한다더니

연홍지탄(燕鴻之歎)이 어찌 날것들만의 일이겠소?

천자의 나라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외다.”

문덕의 탄식을 들은 배구는 기쁨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장군께서는 무엇을 그리 걱정하오?

나무는 새를 가리지 못하나 새는 얼마든지 나무를 가려 앉을 수 있는 법이오.

백성이 성군의 다스리는 땅을 찾아 옮겨다니는 것과 장수가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바꾸어 섬기는 것은 앉을 나무를 고르는 새의 일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소.

지금이라도 성문을 열어제치고 황제의 거가를 맞이한다면 당장 오늘밤부터는

천자의 신하로서 만시름을 잊고 베개를 높여 잠들 수 있을 게 아니겠소?”

배구가 회유하자 문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맛을 다셨다.

“공의 말도 틀린 데는 없지만 일이 그처럼 간단한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이 간단치 않다는 말씀이오?”

“지금 요동에는 수십 개의 성이 있고, 성마다 성주와 이름난 장수들이 있습니다.

이 요동성 성주인 고신만 해도 그렇지요.

고신은 옛날 호태대왕(광개토대왕)의 예손이요, 왕실의 혈족일 뿐 아니라,

그의 용맹과 지략은 혼자서도 능준히 10만의 군사를 당할 만큼 비범하고 출중한 데가 있습니다.

게다가 현도성의 낙우발과 개모성의 방고는 비록 늙었지만 항우의 힘과 유방의 지혜를 가졌고,

신성의 추범동과 오골성의 우민은 내 휘하에 있던 자들이지만 무예가 오히려 나를 능가하며,

비사성이나 백암성, 안시성의 성주들도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오.

이런 판국에 나 하나만 달랑 황제께로 가서 천자의 신하가 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내가 듣기로 요동 각 성의 성주들은 모두 맏형을 따르듯이 을지장군을 따른다고 하였는데,

장군께서 성문을 열고 황제께 투항한다면 누가 감히 이에 맞서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공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과 기질을 잘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외다.”

문덕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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