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3장 요하(遼河) 1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4. 18:10

 

제13장 요하(遼河) 14

 

 

 

그는 연하여 아홉 장수의 이름을 차례로 거명하였다.

이에 따라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扶餘道)로 향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樂浪道)로 향하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향하고,

우효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향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道)로 향하고,

우어위장군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향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향하고,

탁군 태수 겸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향하고,

마지막으로 형부상서 겸 검교우어위 호분랑장 위문승은 증지도(增地道)로 향해서

제군이 저마다 맡은 길의 성곽을 장악하여 북평양 일대를 토평한 뒤 압록수 서쪽에서

다시 모이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고도 양광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곧 수도 대흥에 있던 내호아(來護兒)에게 장군 주법상(周法尙)을 보내 내호아를

수군(水軍)의 좌익위대장군으로 삼고, 주법상을 부총관으로 삼으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강과 물가에 사는 수부들을 징발하고 배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바다가 뒤덮일

대규모 선단을 만들라.

그리하여 등주에서 바닷길을 통해 비사성을 치라.

비사성을 취하거든 그대로 동진하여 남평양을 공격하되,

그럴 때쯤이면 우리도 틀림없이 요동을 정벌하고 남평양 북방에 이를 것인즉,

수륙 양방으로 성원상접(聲援相接)한다면 적의 도성을 한결 수월하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수군이 먼저 남평양을 장악하면 당연히 고구려왕 대원을 포승에 묶어 무릎을 꿇린 뒤에

사대문을 열어 짐의 거둥을 맞이할 것이지만, 만일에 우리를 두려워한 고구려의 신하들이

왕을 죽이고 먼저 항복하여 오거든 그 수괴를 예우하고 그로 하여금 짐의 행차를 맞도록 하라!”

하고 명하였다.

양광이 여러 가지 위험과 군량이며 물자를 조달하는 불편을 무릅쓰고 육로로 백만이 넘는 대병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수군까지 동원한 속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렇게 하면 소국인 고구려는 자연히 그 위엄과 기세에 짓눌려 싸움을 포기할 공산이 컸고,

설혹 왕이 항전할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정에 분란이 생겨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도 다분했다. 양광은 등극한 이후 동쪽을 제외한 서남북의 많은 주변국을 병탄하면서

그러한 예를 허다히 보아왔기 때문에 고구려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신하들을 통해 고구려 조정에 자신과 수나라를 섬기려는 무리가 주류를 이루는 반면,

맞서는 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고 듣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요하를 건너기만 하면 성주들은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이며,

백성들은 모두 길거리로 뛰쳐나와 쌍수를 흔들며 천자 나라의 신민으로 살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고 환영할 줄 알았다.

양광은 그 여세를 몰아 단숨에 압록수를 건너고,

고구려 도성인 남평양의 장안성까지 파죽지세로 행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런 까닭에 그는 출병에 앞서 미리 항복한 고구려땅을 수나라의 군현제(郡縣制)로

개편할 계획을 세우고, 아울러 각 군현의 책임자까지 정하여둔 상태였으며,

심지어 조세를 10년 동안 감면하고 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여 고구려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세세한 방안까지 마련해두고 있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장 요하(遼河) 16 회  (0) 2014.07.24
제13장 요하(遼河) 15 회  (0) 2014.07.24
제13장 요하(遼河) 13 회  (0) 2014.07.24
제13장 요하(遼河) 12 회  (0) 2014.07.24
제13장 요하(遼河) 11 회  (0) 201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