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가잠성(椵岑城) 7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뒤부터 서현을 찾아 만노군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날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찾아오는 이들이 시초에는 대개 금관국의 후손들이었는데,
시일이 흐르면서 다른 가야국 출신들까지 가세하여 서현이 거처하는 태수 관저가
연일 억울하거나 원통한 사연을 가진 망국민들로 북적거렸다.
사람이 많으니 담고 오는 사연도 각양각색이라,
개중에는 과연 망국지한에 걸맞은 딱한 경우도 있었지만 더러 혼처를 구해달라거나
재물을 모으게 해달라는 이도 없지 아니하고, 한사코 딸을 데려와 바치겠다며
어구망측한 고집을 피우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가야국을 재건하자고 은밀히 속삭여서
서현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전날 나라가 망할 초입에는 망국의 높은 지위에 있어
신라 조정에서 품계와 벼슬을 얻었지만 그 후로 금성의 텃세를 견디지 못해
도태된 망국대부의 후손들 중에서도 간혹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무슨 청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서현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만족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됐건 서현은 이들을 박대하지 않았다.
성보를 시켜 관저 옆에 행랑채를 짓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면대하여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따뜻한 말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돌려보내곤 하였다.
서현이 공무를 보느라 바쁠 때는 주로 성보가 이 일을 대신했다.
성보는 서현의 장인인 숙흘종이 죽고 나서 만명부인을 찾아온 부인의 몸종 살피(薩皮)와 혼인하여
슬하에 소천(昭天)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그 자신 또한 함안의 아시량국(아라가야) 망국민 출신인지라
마치 제 일처럼 문객들의 사정을 보살폈다.
이런 날이 오래 지속되면서 만노군은 여섯 가야국 후손들의 유일한 의지처로 자리를 잡아갔다.
서현에게 도움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그 뒤가 좋아져서 철마다 방물을 싸들고
찾아오는 이도 생겨났고, 더러는 행랑채에서 만나 저희들끼리 먹고 살 방도를 구하거나
혼담을 넣어 가연을 맺기도 했으며, 아예 살던 곳을 떠나 만노군 근처로 이사를 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자네들, 용화 도령을 보았나?”
“아까 만노군 들머리에서 말을 타고 비호처럼 달려가는 것을 보았네.”
“나는 용화 도령을 볼 적마다 하늘에서 무슨 각별한 뜻이 있어 낸 인물인 것만 같네.”
“각별한 뜻이라니?”
“혹 누가 아는가? 우리 가야국의 망민들이 죽도록 고생하고 있으니
지하의 열성조가 보다 못해 용화 도령과 같은 인물을 보낸 건지도 모르지.”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만노군을 찾아오는 망국민들 사이에선
차츰 서현의 장자 용화의 기품을 두고 입질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용화가 나이 일곱에 이미 말을 몰았고, 열 살 무렵에는 달리는 말잔등에 뛰어오르기도
곧잘 하지만 달리는 말잔등에서 뛰어내리기도 곧잘 하여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 헌칠하고 준걸한 용모가 제 나이보다 오륙 년은 족히 더 노성해 보여 열다섯에 이르자
빈틈없는 청년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라 왕실에 저만한 인물이 과연 있던가?”
“왕실이건 저자건 신라에 잘난 인물이 있어야 말이지.
금왕부터가 멋대가리 없이 기골만 장대했지 제왕의 천품을 타고난 인물은 아님세.
국반도 아들이 없기는 금왕과 마찬가지고, 기껏 백반에게 아들이 둘 있지만
생긴 꼬락서니가 왕의 재목은커녕 어디 가서 빌어 처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하더구만.”
“저희들이 제아무리 성골이네 씹골이네 해도 따지고 보면 별수가 없으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눈으로 보는 순간에 판가름이 나는 걸.”
망국민들은 용화의 우뚝하고 늠름한 기상을 보면서 자신들의 고달픔에 한가닥 위안을 삼곤 했다.
“자고로 용이 용을 낳고 봉이 봉을 낳는다지만 용화 도령이야 용과 봉이 만나 낳은 인물이니
그럴 수밖에 더 있나?”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금관국과 신라국 두 왕실의 피가 용화 도령에게 이르러 합쳐진 것을 말하네.
이치로 따지자면야 성골의 제일 윗자리에 우리 용화 도령이 있는 셈이지.”
“옳거니! 여기 태수 어른도 인물로야 누구한테 빠지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제들의 기품이 오히려 윗길이니 그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닐세!”
“아무튼 망한 가야국 왕실에 저와 같이 걸출한 인물이 났으니 낙담하지 말고 오래 살고들 볼 일일세.
또 누가 아는가? 우리 살아 생전에 망국이 다시 서는 좋은 날을 볼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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