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가잠성(椵岑城) 6
해론은 그즈음 신라의 화랑도 사이에서 차차 두각을 나타내던 용화향도(龍華香徒)의 일원이었다.
언제부턴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용화향도는 그 성원이 모두 합해야 일흔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수의 무리였다.
통상 수백에 달하는 낭도들이 적지 않은 판국에 고작 일흔여 명에 불과한 그들은 숫자로는
별것이 아니었지만, 산야를 누비며 무예를 겨루거나 용맹을 시험하는 일에서는
어떤 무리에도 뒤지는 법이 없었고,
그 규율의 엄격함이나 수련의 가혹함은 만인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본래 용화향도는 그 우두머리인 용화 김유신(金庾信)을 따라 국원소경 부근의 산자수명한 곳을
찾아다니며 도의를 연마하던 10여 명의 청년들이 그 모태였으며,
시초의 구성원들은 모두 멸망한 금관국과 가야국의 후예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유신의 아버지 서현(金舒玄)이 오랫동안 만노군 태수를 지낸 일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어느 해인가 서현에게 일선군(선산)에 사는 노인 하나가 찾아와서 다 죽게 된 자식의 일을
의논한 적이 있었다.
사연인즉 노인의 아들이 모혜현(芼兮縣)의 배씨(裵氏) 성을 가진 부잣집에서 여러 해 품을 팔았는데
배부자가 품삯을 차일피일 미루는 통에 끼니조차 거를 때가 많았을 뿐 아니라,
한겨울 농한기에 나라의 부역을 갔다가 두어 달 만에 돌아왔더니
그새 도둑놈으로 몰려 도리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노라 하였다.
“나락 열 섬 값을 물지 못하면 자식놈은 고사하고 일문 전체가 노비 신세를 면치 못할 형편이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서현은 노인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일선군의 일을 만노군에 와서 하소연하는 것이 궁금하여,
“그런데 노인장은 어찌하여 나를 찾아와 그런 의논을 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소인 같은 망국민들이 믿을 데라야 나라에 태수 어른밖에 더 있습니까요.”
하여 그제야 그가 금관국 사람임을 알았다.
노인이 문득 고개를 돌려 땅이 꺼지게 한숨을 토하며,
“지금이야 신세가 지나가는 개도 하찮게 여기는 오그랑바가지가 되었지만
소인네 일문도 전날 금관국이 번성했을 때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는 관직을 지냈고
소인의 고조 대에는 재상의 벼슬까지 지낸 이가 있었습니다.”
하고서,
“평생에 망국민으로 겪어온 설움이야 어찌 필설로 다 할 수가 있겠소.
이놈한테 치이고 저놈한테 눌리고,
2월에 부역을 나갔다가 오면 7월에 또 모군(募軍) 통기가 오고,
그래 관아에 찾아가서 말이라도 할라치면 문 앞에서 벌써 목자부터 부라리며
명줄 붙어 있는 것도 감지덕지인 줄 알라고 호통입지요.
부역을 나가서도 어렵고 힘든 일은 몽땅 우리네 차집니다.
소인에게 아들놈이 셋이고 딸년이 둘인데, 딸년 둘은 옳은 혼처도 못 구해서
모다 늙은이 후살이로 들어갔습니다.
아들놈도 하나는 진작에 장사치로 나서고 둘은 남의 집에 품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데,
같은 신세를 만나야 짝이라도 이루고 친구라도 삼을까
그렇지 않으면 천날만날 외톨이로 지낼 도리밖에 없습니다요.
이번 이 일만 해도 그렇습지요. 배가놈이 같이 품 팔던 신라 사람들한테는
모다 품삯을 꼬박꼬박 챙겨주면서 유독 소인의 자식놈한테만 사사건건 오금을 걸고 나왔는데,
도둑놈이라고 누명을 덮어씌운 것도 관아의 구실아치들과 한통속이 되어 가야놈이 아니고선
도둑질할 놈이 없다고 잡아 족쳤다니,
전날 신라 왕실에서 망국민도 신라 백성들과 똑같이 보살피겠다고 왕명으로 말한 것은
순전히 말뿐이요,
실은 마소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소인의 주변에는 금관국뿐 아니라 여섯 가야국의 망국민들이 제법 있습니다만,
그 처참하고 기구한 형편은 일일이 말로 옮기기가 어렵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장황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 지경이오?”
서현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묻자 노인은 허탈하게 웃음을 지었다.
“나리처럼 높은 벼슬에 계시는 분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와 같은 범골 이하 천한 것들은 이승이 곧 지옥이올습니다요.”
그리고 노인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가야국 출신의 천민들에 비하면야 저희는 또 호시절을 살고 있습지요.
그네들 중에선 오죽하면 자식을 낳아 제 손으로 죽이는 사람까지 있겠습니까요?”
노인의 처참한 말에 서현도 눈물을 흘렸다.
망국민들이 더러 신라 사람들에게 천대와 따돌림을 당한다는 말은 풍설로 들었지만
아이를 낳아 제 손으로 죽일 만큼 지독한 멸시와 업신여김을 당하는 줄은 서현도 그제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금성에서 벼슬을 살 때 조정 대신들이 간혹 자신을 멀리 두고 쑤군거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만명이 아이를 뱄을 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일도 고요히 생각하니
반드시 골품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실제로 자신의 아버지 무력 장군이 전조에 워낙 대공을 세운 사람이라
그 덕으로 벼슬도 얻고 험한 꼴도 안 당하고 살아왔지만 자신을 제외하면
망국대부의 자손들치고 변변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금관국이 망한 지 70여 년, 시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라에서 새로 품계와 관작을 얻고
벼슬길에 나갔다고 들었으나 이제와 둘러보면 거의가 지리멸렬하였고,
그나마 외지에서 현령 자리라도 꿰차고 있는 이는 고작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 서현의 뇌리를 강렬하게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무력 장군이 살아 생전에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었다.
“내 비록 태어나기로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나라가 없어졌는데 어찌 왕자가 있겠는가?
다 부질없는 소리요,
나는 그저 주인을 따라 사냥터에 나온 사냥개에 불과하네.
사냥개가 살아남자면 주인의 뜻을 좇아 열심히 뛰고 끊임없이
주인이 좋아할 사냥감을 물어오는 수밖에 더 있는가?
세상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곳이 아니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살아나지를 못한다네.
주인도 주인이지만 주인 옆에 있는 무사들이 더 무섭지.
그들은 사냥개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힘을 아낀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주인에게 말하여 없애버리거든.”
노인을 만난 것은 서현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는 당장 구실아치로 데리고 있던 성보(星譜)를 일선군 군주(軍主)에게 보내어
모혜현의 일을 글로써 알리고 노인의 억울한 사정을 밝혀달라고 간곡히 청하였고,
성보가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열심히 뛰어다닌 끝에 겨우 일이 타첩되어
옥에 갇혔던 노인의 아들이 누명을 벗고 풀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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