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2장 가잠성(椵岑城) 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0. 17:29

제12장 가잠성(椵岑城) 3

 

 

 

백제 장수들이 사비성 동남편의 가잠성으로 진격하자 가잠성 성주 찬덕(讚德)은 크게 당황했다.

 

찬덕은 신라의 모량부 사람으로 용춘의 낭도 출신이었는데, 심지가 굳고 성품이 용맹스러우며

 

한번 사귄 사람한테는 정성을 다하는 절개와 의리가 있었다.

 

용춘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갔던 그는 정사년(597년)에 용춘이 백반 무리의 모함으로 물러날 때

 

귀산, 파랑 등과 더불어 지방의 현령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 귀산과 파랑은 왕명에 불복하여 스스로 벼슬을 버리니 찬덕도 한동안 고민하다가

 

용춘을 찾아가서 사직할 뜻을 밝혔다.

 

그런데 용춘이,

“그렇다고 해서 공과 같은 인재들이 모두 조정을 떠나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소?

 

사사로운 의리와 절개도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무릇 더 중한 것이 나랏일이 아니오?

 

내 이미 공의 마음을 알고, 공이 내 마음을 알면 그뿐이지 굳이 사직을 할 까닭이 없소.

 

그러잖아도 귀산과 파랑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음이 편치 않다오.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가 어찌 이토록 없단 말씀이오!”

하며 탄식하는 것을 듣고는 통연히 마음을 고쳐 왕명을 따랐다.

 

이후 찬덕은 여러 곳의 현령을 지내며 선정을 펴고 고을을 잘 다스려서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그가 거타주의 속현인 가잠성의 성주로 부임한 것은 백제의 침략을 받기 1년 전인

 

진평왕 건복 27년(610년) 경오의 일이었다.

위기에 빠진 찬덕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내의 군사들에게 활과 돌을 준비시켜

 

대적하는 한편 성루에서 봉화를 올려 팔방으로 위급함을 알렸다.

 

봉화를 통해 사태를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급히 중신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의논하였지만

 

대부분의 군사들이 북방으로 나가 있는 터라 원병을 보내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신라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백제에게 불시의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지금 나라의 모든 장수와 군대가 한수 이북에 포진하고 있으므로 가잠성을

 

구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북방의 군사를 빼낸다면 이를 눈치챈 고구려가 반드시 군사를 낼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상대등 수을부가 죽은 후로 거진 10여 년째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던 진정왕 백반이 말하였다.

 

왕이 탐탁찮은 듯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로,

“용춘이 입궐하여 누차 백제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대와 남승은 무엇이라 하였던가?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우리보다 더한 원심을 가졌으므로 우리를 공격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거라고 용춘의 우려를 한껏 조롱하지 않았던가?”

하며 따지듯이 물었다.

천명 공주와 사이에 아들 춘추(春秋)를 낳고부터 용춘에게 내려졌던 금족령이 풀렸고

 

왕의 신임도 조금씩 늘어갔다.

 

아들이 없던 백정왕에게 첫 외손인 춘추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장녀 덕만은 출가한 몸이요,

 

셋째 선화는 백제의 왕비가 되었으니 왕에게는 오직 천명과 춘추가 있을 뿐이었다.

 

왕은 임술년(602년)에 춘추가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를 천명과 함께

 

대궐로 불러 조석으로 면대하고 좋아라 하였으며, 아이가 아장아장 걷고 입에 말을 담기 시작하자

 

밤낮없이 대궐에서 끼고 살았다.

 

심지어 편전에서 정사를 돌볼 때도 무릎에 올려놓고 볼 정도였다.

 

게다가 용춘을 싫어했던 마야 왕비조차 춘추가 생기면서 태도가 달라져 딸 내외를

 

자주 궁으로 청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때가 많았다.

 

왕과 왕비가 자식을 귀애하는 정은 춘추가 자라면서 더욱 깊어졌다.

 

째보에 애꾸라도 밉지 아니할 판국에 춘추는 나이 예닐곱에 벌써 모르는 글이 없고

 

거동이 어른처럼 의젓하니 용춘을 지극히 못마땅해했던 노대비 만호 태후조차도

 

춘추만 보면 품에 안고 얼러대기를,

“욘석은 순전히 외탁을 하였구나.”

기실은 일가끼리 상피(相避)의 소생이라 외탁, 친탁의 구분이 모호한데도

 

우정 그렇게 주장하며 귀여워하였다.

비록 자식 덕분에 부쩍 자주 대궐을 들락거리게 된 용춘이었지만

 

그는 평소 정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지냈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우명산성을 뺏긴 후 백제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하자

 

왕에게 이를 시정해야 한다고 지나치는 소리로 몇 번 간하였고,

 

왕은 그때마다 백반과 남승에게 용춘의 우려하는 바를 전하였으나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코방귀만 뀌었다.

 

심지어 백반은 전날 백제가 화친할 것을 제안했던 일을 말하며,

“삶은 닭이 울었으면 울었지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에도 급급한 백제가

 

우리나라를 칠 까닭이 없습니다.

 

도리어 부여장은 전날처럼 선화의 면을 내세워 우리에게 화친을 제안해올 것이니 두고 보십시오.”

입찬소리를 하면서,

“용춘이 물외한인으로 오래 지내다 보니 아마도 바보가 된 듯합니다.

 

대적(大敵)을 앞에 두고 이웃을 친다는 용춘의 걱정은 병법의 기본도 알지 못하는

 

공연한 기우이오니 전하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며 용춘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런 뒤끝에 백제의 공격을 받았으니 아무리 백반이었지만 대답할 말이 궁했다.

“대체 알지 못할 무리가 백제요, 부여장입니다.”

백반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가잠성을 포기할 것인가?”

“그까짓 쓸모없는 성곽 하나쯤이야 선화에게 주어도 그만입니다.

 

차라리 그보다는 수나라 양제가 군사를 낼 때 틈을 보아 고구려를 치는 것이 한결 상책이올시다.”

“고구려를 친다고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기둥을 치면 들보가 울고 마룻대가 부러지면 서까래가 무너지는 법이다!

 

고구려에 우명산성을 잃고 이제 다시금 백제에 가잠성을 잃는다면

 

뉘라서 우리 신라를 얕보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천하의 우스갯감이 될 뿐이다!”

백정왕은 옥음을 높였다.

 

왕의 진노를 대한 백반은 당황하여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한참 만에 궁여지책을 내었다.

“결국은 주변성에 말하여 향군으로 돕는 수밖에 달리 계책이 없을 듯합니다.

 

지금 당장 군령을 내려 상주와 하주, 북한산주의 군사로써 가잠성을 구원토록 하겠나이다.”

어전을 물러나온 백반은 즉시 3주의 군주들로 하여금 원군을 이끌고 가잠성을 돕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