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단귀유(段貴留) 14
한편 귀유를 제거하고 다시금 고구려 조정을 장악한 남진파들은
백제의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한 데 이어 이듬해인 무진년 2월에는 신라를 습격하여
남녀 8천여 명을 사로잡았고, 4월에는 또 우명산성(牛鳴山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들은 동돌궐과 동맹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양광이 침략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공연한 기우로만 여겼다.
양광의 야욕을 과소하게 여겨 수나라를 정성껏 섬기는 척만 한다면
북방의 변란은 없으리라 장담하였고,
그보다는 수나라가 남북조를 아울러 강성해졌듯이 신라와 백제를 아우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북방을 지키던 군대를 속속 빼돌려 오로지 병력을 남으로만 집중시켰다.
동돌궐의 족장 계민은 오랫동안 예원 공주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사신을 보내 공주의 일을 물었다. 이에 건무는 왕에게 말하여 공주의 몸종을
공주라고 속여 계민에게 보내고 정작 예원 공주는 자신을 따르던 동부 욕살 고명화와 혼인을 시켰다.
이로 하여 건무의 위세는 더욱 높아졌고, 조정의 백관들은 모두 그에게 복종해 감히 거역하거나
반대하는 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고구려 남진파들의 이같은 상황 인식은 대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그릇된 것이었다.
고구려 군대의 잇단 습격을 받고 성과 백성들을 잃은 백제와 신라는 스스로 군사를 내기보다는
수나라 양광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책략을 썼다.
양국은 해마다 수나라에 조공 사절을 보내온 터라 나름대로 수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으며,
더구나 양광의 뜻이 옛날부터 고구려 정벌에 있었음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한 해에도 몇 차례씩 조공을 바치고 사신을 파견해 양광의 비위를 맞춘 다음에
고구려의 포악함을 다스릴 이는 천하에 오직 수나라가 있고 양제가 있을 뿐이라며
갖은 말과 글로써 양광을 추켜세웠다.
백제와 신라의 이같은 전략은 대운하를 완공하고 주변국을 정복하여 우쭐함이
극에 달했던 양광의 마음을 들쑤셔놓기에 충분하였다.
게다가 이때쯤 수나라 조정에서도 백성들의 드높은 원성을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운하를 완공하느라 지나치게 무리한 노역을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양광은 백제 사신으로 온 좌평 왕효린이 장왕의 뜻을 전하자,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은 짐의 오랜 숙원으로 그대의 나라가 청하지 않아도 곧 행할 일이다.
다만 요하의 지세가 험난하고 기후의 변덕이 심하여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
너는 돌아가서 너의 임금에게 말해 고구려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도록 하라.”
하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장왕은 이 말을 듣자 몸이 후끈 달아 계속해서 사신을 파견하여 양광을 부추겼다.
신라의 고승 원광이 지은 명문의 걸사표가 도착한 것도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살생을 금하는 승려의 처지로 남의 나라 왕에게 걸사표를 지어 바친다는 것은
언뜻 수상한 일이지만 원광은 백정왕이 이를 부탁하자,
“자신이 살려고 남을 멸하는 것은 비록 사문의 도리와 행실이 아니오나 빈도가
대왕의 땅에 살고 대왕의 수초를 먹으면서 어찌 대왕의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흔쾌히 붓을 들어 장강대필의 명문장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원광이 쓴 걸사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신라 사신에게서 원광의 걸사표를 받아 읽던 양광의 안색이 서서히 달아오르더니
읽기를 마치자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 글을 읽고 어찌 군사를 내지 않으랴!”
하고 고함을 질렀다.
어쨌거나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이 겹쳐 양광은 마침내 고구려 정벌을 결심하고
대군을 소집하니 이때가 신미년(611년) 2월 초봄,
양광이 부형을 살해하고 제위에 등극한 지 햇수로 8년 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은 즉시 백제 장왕의 귀에 들어갔다. 장왕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국지모(國智牟)란 자를 양광에게 보내 수군(隋軍)의 행군 일정을 묻고
함께 군사를 내어 싸울 뜻이 있음을 내비쳤다.
양광은 장왕의 제안을 비웃으며,
“고구려 따위를 치는 데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고 으시댔다. 그때 상서기랑 석률(席律)이 말하기를,
“하오나 백제왕이 성의를 표해왔으므로 굳이 무안을 줄 까닭은 없지 않겠습니까?
국지모에게 상을 내리고 사신을 딸려 보내 함께 의논이라도 하는 체해두는 편이
여러 모로 좋을 듯합니다.”
하므로 양광은 그 말을 옳다고 여겨 국지모에게 상을 내리고 석률을 백제로 파견해
장왕과 더불어 고구려 정벌을 의논하는 흉내를 내었다.
출병을 결심한 양광은 그해 4월,
수도 대흥의 신하와 장수들을 거느리고 고구려에서 가까운 탁군(북경)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이때부터 수나라 전역에서 소집령을 받은 장정들이 일제히 탁군으로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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