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가잠성(椵岑城) 1
한편 부여장은 양광이 탁군에 나와 군사를 소집한다는 소식에 접하자
문무 백관들을 불러모으고 대책을 의논했다.
장왕은 양광이 비록 고구려 정벌을 작심했다지만 혹시 허세만 부릴 뿐
실제로는 군사를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양제는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요동 정벌을 주장해온 사람이나 선왕 문제가 30만 대병으로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을 내심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8년이 지나도록 군사를 내지 않을 까닭이 있는가?
어쩌면 이번에도 탁군에서 괜히 엄포만 놓았다가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번례(蕃禮)를 약속하면
도로 대흥으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왕이 의심하자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사신으로 수나라를 다녀왔던 은솔 국지모였다.
“양제가 등극한 지 8년이 지나도록 요동으로 군사를 내지 않은 것은 사실이오나
이번에 탁군으로 행차한 것은 공갈이나 엄포가 아닌 듯합니다.
이는 신이 수나라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만나보고 확인한 사실이옵고,
또한 상서기랑 석률이 다녀간 것만 봐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국지모의 말에 역시 수나라를 다녀온 좌평 왕효린이 덧붙였다.
“신이 보기에도 국지모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수나라에는 우문개, 우문술 형제와 내호아, 우중문, 위문승, 설세웅, 신세웅, 조효재, 최홍승 등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장수들이 있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1백만 군사를 이끌기에 손색이 없는 뛰어난 명장들입니다.
그 가운데 한두 사람만 보내도 고구려 따위는 하루아침에 토벌할 수 있을 것인데
무엇을 더 망설이겠습니까?
신이 대흥에 갔을 때도 비단 양제뿐 아니라 앞서 말한 장수들이 이구동성
고구려 토벌을 주장하였으니 틀림없이 이번에는 군사를 내고야 말 것입니다.”
왕효린의 말이 끝나자 한솔 연문진도 자신이 보고 온 수나라 사정을 전하는데,
앞의 두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왕은 수나라를 둘러본 신하들의 말이
약속이나 한 듯 일치하자 더 이상 이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걱정은 던 셈이나 그 대신에 다른 걱정이 생겼구나.”
왕은 수나라가 군사를 낼 때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음을 말했다.
“막상 수의 대병이 움직인다면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향도를 자청한 우리가
어찌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원군을 내어 돕는 척이라도 해야 체면을 세울 것이 아닌가?”
왕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북방의 고구려가 본조에는 오랫동안 근심이자 우환인 것은 사실이요,
그런 까닭에 어떻게든 수나라를 부추겨 고구려를 치도록 힘을 쏟아왔지만
정작 우리가 바라고 노린 것은 양국의 싸움이지 우리 군사가 그 싸움에 끼여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수나라가 이긴들 우리에게 과연 무슨 득이 있겠는가?
하다못해 요서의 대방고토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원군을 보내 내 일처럼 싸우겠지만
지금 군사를 낸다면 귀중한 목숨과 물자만 축낼 뿐이다.
더 깊이 생각하면 양제의 야심은 천하를 아울러 수의 땅으로 삼으려는 데 있다.
지금은 고구려가 있어 그나마 우리와 화친하여 지내는 것이지 만일 고구려마저 병탄한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와 신라로 군사를 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이를테면 고구려는 있어도 걱정이요, 없어도 걱정인 묘한 존재다.”
장왕의 날카로운 지적에 백관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훗날의 일이요,
지금 경들이 시급히 머리를 짜낼 일은 우리가 어찌하면 아무 이득 없는
양국의 싸움에서 발을 빼내느냐는 것이다.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옳겠는가?”
왕이 좌중을 둘러보니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으나
오직 내신좌평 개보만이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있다가 왕과 눈이 마주치자,
“신이 아뢰겠나이다.”
하며 입을 열었다.
“과연 전하께서 지적하신 말씀은 어느 한 군데도 그른 것이 없사옵니다.
군사를 내지 않으려니 양제의 원망을 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요,
군사를 내자니 세상에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올습니다.”
“그것이 무언가?”
장왕이 묻자 개보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수군이 움직일 때보다 한발 앞서 우리가 먼저 신라와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지금 신라는 고구려에 우명산성을 잃고 나라의 모든 관심을 북방으로만 쏟고 있으므로
남쪽과 서쪽은 자연히 방비가 허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신라의 요긴한 성들을 쳐서 뺏는다면 일이 한결 수월할 것이요,
또한 이 사실이 수나라에 알려지면 훗날 원군을 내지 않았다 하여
양제의 원심을 사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니 가히 일거양득이 아니겠습니까.”
개보의 말에 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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