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1장 단귀유(段貴留) 1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0. 09:27

 

제11장 단귀유(段貴留) 13

 

 

 

대궐로 돌아온 귀유는 덤덤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남진파들이 다투어 죄상을 꾸며낼 때도 별다른 변명을 아니하였고

 

대원왕이 언성을 높여 꾸짖어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귀유의 침묵은 왕을 더욱 노엽게 만들었다.

“저놈을 당장 끌어내어 참수하고 그 일족을 남김없이 멸하라!”

이윽고 추상과 같은 왕명이 떨어져도 귀유는 그 태도며 안색에 조금도 동요하는 빛이 없었다.

 

이에 막리지 연태조와 북부 욕살 고창개(高猖芥), 신참 태대사자 고정의(高正義) 등

 

일부 북진파 신하들과 처음 귀유를 왕에게 천거한 고추대가 이명신, 태학박사 이문진 등이 나서서

 

귀유가 젊은 것과 그의 식견이 뛰어난 점을 들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간청도 배신감에 찬 왕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지 못하였고,

 

다만 귀유의 일족에까지 화가 미치는 것을 막는 데 그쳤다.

귀유는 주괴의 목이 떨어졌던 궐문 밖의 같은 장소에서 망나니가 휘두른 칼에 참수되었다.

 

죽은 귀유의 시신은 하룻동안 저자에 효시되었다가 식솔들에게 전해졌으며,

 

귀유의 처는 이를 거두어 그의 고향인 절나부로 가서 장사지내고

 

시부 단향의 무덤 아래 비석도 없이 묻었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한 역적의 죽음이니

 

그 뒤끝이 초라하고 쓸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평소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수많은 식객들과 문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고,

 

조문이라도 다녀간 자는 이웃에 살던 늙은이 두엇뿐이었다.

 

심지어 절나부에 살던 형제들과 일가붙이들조차 장사가 끝나도록 얼씬거리지 아니하니

 

자고로 권세를 따라 움직이는 염량세태(炎겆世態)의 비정함이 이와 같았다.

귀유의 처는 아들인 선도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몸을 의탁했다.

 

본래 고구려는 여자가 귀한 곳이었다.

 

친정에서는 딸의 나이가 아직 젊으므로 해를 넘기자마자 사방에 매작을 놓았고,

 

곧 데릴사위 노릇을 하겠다는 장정들이 줄을 지어 몰려들었다.

 

귀유의 아들인 여덟 살짜리 선도가 그 어미에게 말하기를,

“저는 단씨 집안의 사람으로 어머니가 개가하시는 데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전날 아버지께서 만일 오갈 데가 없어 낭패로운 때를 만나거든

 

지체하지 말고 북방의 안시성으로 가서 을지문덕 장군을 찾아뵈라 하셨으니

 

어찌 그 유언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이니 어머니께서는 외조부께 말하여

 

제가 타고 갈 말 한 필만 내어주십시오.”

하였다. 어미는 자식과 헤어지는 것이 탐탁찮아 가타부타 말이 없는데

 

나머지 외가 식솔들이 나서서,

“어린 녀석의 생각이 참으로 가상하고 갸륵하구나.

 

아비의 유언을 좇는 것은 자식의 도리이니 뉘라서 이를 말리겠느냐.

 

그러나 요동은 길이 험하고 네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기가 어려우니

 

사람을 하나 붙여 데려다 주겠다.”

하고는 그 김에 겸사겸사 데릴사윗감 하나를 물색하여 그로 하여금

 

안시성까지 데려주고 오도록 하였다.

 

선도가 의붓아비 될 자를 따라 여러 날에 걸쳐 북향하여

 

을지문덕이 있는 막사에 당도하자

 

문덕은 선도를 품에 답삭 안아 볼을 비비며 좋아하다가,

“내 너를 마땅히 양자로 삼으리라.”

하고서 단선도의 이름을 고치어 을지 성씨를 붙이고 명자(名字)도 새로이

 

유자(留子)라고 지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귀유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