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단귀유(段貴留) 11
귀유가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을지문덕을 따라 개축한 오골성을 둘러보고 돌아와서
막 금주로 떠나려 할 때였다.
그는 소식을 듣는 순간 판세가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제 저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귀유의 탄식을 들은 을지문덕이 깜짝 놀랐다.
“조정의 종작없는 중신들이 작당하고 공모하여 수시로 국력을 허비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올시다.
이는 단공께서 없는 틈을 타 건무의 무리가 대왕의 성총을 흐려놓은 것일 뿐
어찌 공의 목숨이 달린 일이겠습니까?”
문덕의 말에 귀유가 머리를 저었다.
“양광의 교지를 받아보고도 백제를 친다는 것은
궐내의 사정이 제가 떠나올 때와 판이하게 다른 것이요,
이미 전하의 마음이 제게서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전하의 마음이 제게서 떠날 적에는 반드시 저에 대한 씻지 못할 모함과 음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처음부터 우려했던 일이기도 합니다.
모르긴 해도 양광의 교지를 지니고 먼저 대궐로 간 주괴 어른도 십중팔구
제가 알지 못할 봉변을 당하고 있을 듯합니다.
어서 도성으로 가야겠습니다.”
귀유는 대궐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문덕이 그런 귀유를 붙잡으며,
“만일 우려하시는 바와 같은 일이 생겼다면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격이 아닙니까?
도성의 사정을 알아본 후에 대비책을 세워 떠나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사람을 보내겠으니 대부께서는 며칠만 더 이곳에 유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곧 믿을 만한 심복을 불러 귀유에 대한 장안성의 소문과 주괴의 소식을
두루 알아오라 하였다.
을지문덕의 심복이 안시성을 출발한 지 근 스무 날 만에 돌아왔다.
그사이에도 귀유는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요동의 강역을 직접 둘러보고
앞으로 있을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각 성의 성주들과 의견을 나누니
문덕이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며,
“저 사람은 실로 장부다.
어찌 조그만 체구에 저와 같은 큰사람이 들었더란 말이냐?
만일 고구려가 저런 인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해를 입힌다면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걷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겠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도성에 갔던 문덕의 심복이 안시성으로 돌아와 도성의 소식을 전하는데
주괴는 이미 참수되어 저자에 그 목이 수일간 효시되었노라 하고,
“주괴의 처와 환덕이라는 제자가 공모하여 주괴를 백제의 밀정이라고 고발한 모양입디다.
입조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주괴가 단대부와 더불어 왕을 속이고 백제와 화친하여
부여장이 주는 백제의 벼슬과 관작을 받기로 했다 하니
대부께서 돌아가시면 주괴와 같은 꼴을 당할 것은 필지의 일입니다.”
하였다. 귀유는 주괴가 죽었다는 말에 통곡하며 슬퍼하였고
을지문덕은 화가 나서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참으로 딱한 일이로다! 단공이 무엇이 답답하여 고구려의 높은 벼슬과 관작을 버리고
백제의 그것을 탐한단 말인가!”
문덕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관무를 보던 한 자 두께의 송판이 단번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그런데 한동안 가슴을 치며 울던 귀유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서 말하기를,
“이것이 미리부터 정해진 운명이라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괴 어른이 이미 모함으로 죽었는데 그를 사지로 내몬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여기 오래 있다가는 장군의 뒷일마저 위태로우니 이만 평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며 귀경을 서둘렀다. 문덕이 황급히 그런 귀유를 붙잡았다.
“화를 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시일이 흐르면 시비와 흑백은 자연히 가려지는 법이니 대부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소나기를 피하셨다가 새로 맑은 날을 얻거든 움직이십시오.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대부와 같은 분이 나라에 꼭 계셔야 합니다.
더욱이 돌아가는 판세를 보아하니 머지 않은 장래에 수의 양광과 대전을 벌일 것은
명약관화한 일인 듯합니다.
어찌 대부의 생사가 혼자만의 일이겠습니까?
장부는 대의를 좇아 죽고 사는 자리를 가린다 했습니다.
지금은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명을 보전하여 후사를 도모할 때이지
사사로운 감상 따위에 젖어 목숨을 가볍게 저버릴 때가 아닙니다.”
문덕의 목소리는 하도 우렁차서 성막이 통째 쩌렁쩌렁 울렸다.
“나라에는 이미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귀유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제가 있다 한들 어찌 대부의 높은 식견에 견줄 것이며,
항차 도성에는 충신을 모함하여 밀정으로 만드는 교활하고 간악한 자들이
임금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이런 판에 공마저 없다면 나라가 대체 어디로 가겠습니까?”
문덕이 워낙 강력히 만류하자 귀유도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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