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단귀유(段貴留) 12
“북방은 지세가 험준하고 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아서 숨어지내기에는 그저 그만입니다.
여기에 그대로 계셔도 무방하지만 금주만의 동제인들이 모인 곳이나 대방군에 가서
몸을 의탁한다면 제가 말이 나지 않을 믿을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거처를 마련토록 하고
의식(衣食)을 돌보아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귀유는 다시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라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이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이 태평성세라면 장군의 말씀을 따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장군이 예견하셨듯이 조만간 온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
칼과 창을 들고 대병과 싸워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사정이 이와 같을 때 필요한 것은 군사를 통솔할 훌륭한 장수와 그를 따르는
군졸들의 일치된 마음입니다.
저 하나로 하여 조정 대신들간의 싸우고 헐뜯는 모습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훗날 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임금의 처분을 따르고 조정의 중론을 받드는 것은 만세를 초극한 신하된 자의 도리입니다.
설령 부당하게 모함을 받아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하여도 그것이 왕명이요,
조정에서 내린 결정일진대 임의로 피하여 구차하게 살길을 도모하는 것은
충신의 행할 바가 아닙니다.”
귀유의 음성은 매섭고 단호하였다.
그는 문득 시선을 돌려 성막 밖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요동의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간 태학의 학도로 시국을 관찰하며 조정에 양론이 있음을 알았고,
일찍이 남화북벌만이 나라를 구할 계책임을 깨달아 이를 힘써 주장하였지만
일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중과부적을 시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귀유는 기꺼이 대궐로 가서 민심의 단결과 사직의 보전을 위하여
하찮은 목숨을 바치려 하거니와, 장군께서는 부디 힘과 지략을 다하여
양광을 물리치고 이 나라의 강역을 굳건히 지켜 세월이 흐른 훗날에라도
단귀유의 안목이 그르지 않았음을 입증해주십시오.
귀유는 장군만 믿고 충신의 마지막 도리를 다하러 가겠습니다.”
문덕은 몇 차례 더 만류했지만 이미 굳어버린 귀유의 뜻을 꺾지 못했다.
귀유가 한필 말에 올라 쓸쓸히 성막을 떠날 때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옷깃이 젖도록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문덕은 자신의 애마인 쌍창워라(엉덩이만 흰 흑마)에 올라 압록수 강가까지 귀유를 배웅했다.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오.”
귀유가 말하자 문덕은 어금니를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리지 연태조는 현명하고 심지가 굳은 어른입니다.
대부께서는 궁리를 다하여 무고함을 주장하시고 막리지께도 말하여 도움을 청하십시오.
꼭 살아서 다시 뵈올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배에 오르시는 것을 보고야 가겠습니다.”
귀유는 다시 한 번 문덕과 눈물로 작별하고 사공이 기다리는 배에 올랐다.
그러다가 홀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도로 배에서 내려 문덕에게 걸어왔다.
문덕의 쌍창워라가 눈치를 채고 귀유 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장군께 한 가지 어려운 청이 있습니다.”
“하십시오. 제가 무슨 말씀인들 좇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미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선도(仙道)이고 나이는 이제 고작 일곱 살입니다.
제가 이제 나라의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면 처야 본인의 의사가 아니더라도
처가에서 주동하여 개가를 시키겠지만 자식놈의 앞길이 걱정입니다.
부모도 없는 판에 항차 역적의 자식으로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세상을 비관하기 십상일 것이니
어찌 큰 뜻을 세워 장부의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식놈이 일찍부터 제법 총명한 구석이 있어서 서너 살 어름부터 글줄도 읽고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 알더니 근자에는 서와 경을 깨우치는데
가끔씩 묻는 말에 신통한 구석이 더러 있습니다.
제가 이놈을 저와 같이 글이나 읽는 선비로 키우기보다는 장군처럼 문무를 겸전한
나라의 큰 장수로 키우기를 바랐거니와, 이제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바랐던 것을 보지 못할 공산이 큽니다.
감히 결례를 무릅쓰고 청하건대 자식놈을 데려다가 장군의 곁에서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마소와 같이 부려주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귀유의 청을 듣자 문덕은 다시금 눈시울을 붉혔다.
“어찌 공의 귀한 자제를 마소처럼 부리겠습니까?
아무 염려 말고 말을 태워 안시성으로 보내십시오.
저의 자식처럼 극진히 보살피고 슬하에 두고 가르쳐서
반드시 대부의 큰 뜻을 잇도록 하겠습니다.”
귀유는 비로소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문덕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혀 하직하고 손을 흔들며 강을 건너가니
문덕의 쌍창워라는 귀유를 태운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압록수 강가에 그림처럼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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