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단귀유(段貴留) 7
이에 귀유가 혼자 양광의 앞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양광의 앞에 나아간 귀유가 예를 다하여 절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수십 명의 장수들이 시립하여 선 한가운데 말로만 듣던 양광이 자리를 높이하고 근엄히 앉았는데,
화려하게 수놓은 황금빛 용포에 머리에는 천자의 관을 쓰고 검은 가죽신과 허리에는
칠보가 박힌 요대를 찬 모습이 과연 만승의 위엄을 갖춘 웅장한 자태요,
요란한 행렬이었다. 양광이 귀유를 내려다보며,
“그대는 어디에서 온 누구이냐?”
하고 물었다. 귀유가 국궁 재배하고 대답하였다.
“신은 고구려에서 사신으로 온 중외대부 단귀유라고 하옵니다.”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의 나라에는 무슨 볼일로 왔느냐?
털끝만큼도 감추거나 기만하지 말라.
너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양광은 귀유를 상대로 으름장을 놓았으나 귀유는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한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제가 감히 어느 안전에서 무엇을 감추고 기만하리이까.
천자의 나라에서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친히 돌궐을 보살피며 양육한다 하므로
고구려에서는 늘 이것을 부러워하였나이다.
그리하여 신으로 하여금 천자께서 양육하시는 돌궐의 영내를 직접 돌아보고
그 제후의 평안한 것과 백성들의 안락한 것을 두루 구경함으로써
장차 국사에 유용하게 쓰일까 하여 온 것일 뿐 다른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양광은 귀유의 말을 듣는 순간 홀연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래, 네가 돌궐의 영내를 둘러보니 어떠하더냐?”
“신이 이제 막 당도하여 샅샅이 보지는 못하였사오나 가한의 근심없는 얼굴과
신하들의 화기 어린 모습을 보고 또 사방에서 백성들의 청아한 노랫소리를 들으니
가히 천자께서 다스리는 땅이구나 싶어 마음에서 절로 흠모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났나이다.”
“허허, 그대는 비록 남의 신하지만 눈이 밝고 마음이 갸륵하구나.”
양광은 매우 흡족해하며 귀유를 칭찬하였다.
이때 용좌 가까이에 시립해 있던 황문시랑4) 배구(裴矩)가
양광에게 다가가서 가만히 귓속말로 아뢰었다.
“고구려는 본래 한(漢)나라, 진(晉)나라가 다 군현으로 삼았던 땅인데,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서 충절을 바치지 아니하여 이역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선제께서는 이를 정벌코자 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직 양량(한왕 양견의 넷째아들)이 불초하여 군사를 내었어도 공을 세우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하오나 지금은 바야흐로 폐하의 시대입니다.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을 것이며,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는 것을
언제까지 방치해두고만 있겠습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폐하를 섬기고 따르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으니
두려운 마음을 가졌을 게 뻔합니다.
저 자를 위협하여 고구려왕 대원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입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광은 자신이 극히 총애하는 환관 배구의 말을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원왕이 순순히 입조할지는 의문이었으나 차제에 고구려의 태도를 알아보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고구려를 휘하에 복속시키는 일은 양광에게는 오랜 숙원이자 천하통일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선제 양견과 갈등이 깊어진 것도 고구려 때문이었고, 살부 살형의 패륜을 저지르며까지
보위에 올랐던 명분 역시 양견이 실패한 요동 정벌에 있었다.
대원왕이 제 발로 순순히 입조하여 복종한다면 굳이 군사를 내지 않더라도
만천하를 아우르는 것이지만, 만일 입조를 거역한다 해도 언젠가는
이를 빌미로 군사를 낼 수 있으니 어느 쪽이건 그로서는 밑질 것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양광은 곧 표정을 근엄하게 하여 귀유에게 말했다.
“짐은 계민이 성심으로 수나라를 섬기는 까닭에 친히 그의 장막으로 행차하였다.
명년에는 반드시 탁군(북경 서남방의 탁현)으로 갈 터이니
그대는 돌아가서 그대의 왕에게 말하여 짐이 탁군에 머물 때 와서 조회하도록 하라.
다른 뜻이 있어 하는 말이 아니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천하의 왕과 제후들이 대흥에 입조하여 복종하기를 마치 뭇별들이 해를 섬기듯 하였거늘
유독 너의 나라만 이를 행하지 않으니 어찌 눈 밖에 나지 않겠느냐?
조회하고 복종하면 마땅히 보살피고 양육하는 예는 계민과 같이 할 것이지만
만약 이를 거역한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반드시 너의 나라로 쳐들어갈 것이니라!”
양광은 말을 마치자 문장가인 우홍(牛弘)에게 자신이 말한 바를 교지에 적도록 분부하여
그것을 귀유에게 주었다.
귀유가 교지를 받아 국궁하고 물러나서 숙소로 오니 조금 후에 계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나를 앞세워 고구려로 쳐들어간다는 양제의 말은 순전히 그의 생각일 뿐
돌궐의 뜻과는 무관한 것이오.
설마 사신께서 그 점을 오해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계민의 해명하는 말에 귀유가 웃으며,
“어찌 그것을 모르오리까. 가한께서는 과히 심려하지 마십시오.”
하니 계민도 비로소 약간 안도하는 낯으로,
“하면 언제쯤 공주를 우리나라로 보내시겠소?
시기를 알려준다면 마땅히 성대한 행차를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거란의 접경까지 나가서 맞을 것이외다.”
하였다. 귀유가 잠깐 생각하다가,
“정확한 시기는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금년은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명년에 양광이 탁군으로 간다는 말을 염두에 두어 대답하자
계민은 입이 한발이나 찢어지며 흡족해하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1장 단귀유(段貴留) 9 회 (0) | 2014.07.20 |
---|---|
제11장 단귀유(段貴留) 8 회 (0) | 2014.07.20 |
제11장 단귀유(段貴留) 6 회 (0) | 2014.07.20 |
제11장 단귀유(段貴留) 5 회 (0) | 2014.07.19 |
제11장 단귀유(段貴留) 4 회 (0) | 201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