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1장 단귀유(段貴留) 8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0. 08:44

  

 

  제11장 단귀유(段貴留) 8

 

귀유와 주괴는 계민과 작별하고 돌궐을 떠나 요서 지방에 이르렀다.

 

전날 외백제의 땅인 요하 부근의 조선, 낙랑, 대방, 광양 등지에는

 

백제의 유민들이 도처에 흩어져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개중에 조선과 낙랑, 대방은 평강왕이 쳐서 고구려의 땅으로 삼았으나

 

수나라가 건국한 뒤 대방과 낙랑의 일부는 도로 빼앗겼는데,

 

3국(고구려, 수, 거란)의 국경이 맞물려 있는 데다 장대한 요하를 중심으로

 

서쪽의 북살수(대릉하)와 동쪽의 태자하(패강)가 어지럽게 뒤엉킨 험난한 지세 때문에

 

늘 정세가 불안하고 영토의 구분이 시류를 따라 오락가락하였다.

 

그런 까닭에 삼국의 왕권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변방 중의 변방인 이들 지역에서는

 

자연히 지역의 자치권이 왕권을 능가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전날 외백제의 유민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물길을 잘 알고 배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서 바다로 나가려는 사람은

 

국적을 막론하고 백제 유민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허다한 부침과 난리를 겪으면서 자신들만의 생존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오직 그들의 자손들에게만 물길의 열리고 닫힘과 배 다루는 비법을 전수하여

 

감히 누구도 넘보지 못할 독보적인 세력과 분야를 구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뱃길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는 국적에 상관없이

 

문호를 개방해 배와 항해술을 빌려주고 배삯을 넉넉히 받아 챙겼다.

 

지켜야 할 영토가 없던 그들에게는 아군도 없고 적군도 없었다.

 

오직 피붙이와 기술과 바다만 있었을 뿐이었다.

백제의 유민들은 요하의 금주만에서 중국의 동해안을 따라 내주와 등주(산동반도)를 거쳐

 

광릉(상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져 살며 자신들을 찾아오는 장사치들의 회역선이나

 

나라의 사신으로 오가는 교관선의 길잡이가 되어 사람들을 원하는 곳까지 실어주고

 

막대한 재물을 벌어들였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동제인이라 칭하였으니 이는 동쪽에 사는 백제인이라는 뜻이었다.

귀유는 북살수 근처의 금주만에서 바로 이 동제인들의 도움을 받아 본국 백제로 들어갈 참이었다.

 

왕에게 전할 양광의 교지를 주괴에게 건네주고 아쉬운 말로 헤어져 혼자 금주만에 당도했을 때는

 

마침 바람도 자고 바다도 잔잔하여 배를 띄우기 안성맞춤인 날씨였다.

 

그러나 몇 군데를 알아보아도 배를 내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귀유가 궁금하여 까닭을 묻자 동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악천후를 점치면서,

“물빛이 저처럼 쌀뜨물과 같을 적에는 본래 배를 내지 않는 법이오.

 

저 물빛은 먼 바다에 엄청난 파도가 인다는 증거외다.

 

정 믿지 못하겠거든 객관에서 하룻밤만 유하시구려.

 

당장 내일 아침만 되면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여 하는 수 없이 객관에서 잠을 잤는데,

 

과연 밤 사이에 일기가 돌변해

 

이튿날이 되자 바다에 풍랑이 일고 해안의 파도가 집채만큼 솟구쳤다.

 

귀유가 물빛만 보고도 닥쳐올 풍랑을 귀신같이 알아내는 동제인들의 재주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하면 언제쯤이나 배를 내겠소?”

“닷새 안에는 어렵지 싶은데 아주 안심을 하자면 열흘 뒤에나 오시오.”

동제인들의 대답을 듣고 나자 귀유는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이내 객지에서 열흘씩이나 기다리느니

 

차라리 그사이에 을지문덕이나 만나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북살수와 요하를 건너 안시성으로 갔다.

 

귀유와 주괴는 동돌궐로 갈 적에 요동성을 지나쳤는데,

 

그때 요동성 성주의 입을 통해 을지문덕이 안시성에 있는 줄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유가 왔다는 말을 듣자 을지문덕은 매우 기뻐하며 관사 밖까지 버선발로 달려나왔다.

“장군께서는 그간 평강하셨습니까?”

귀유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을지문덕은 귀유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러잖아도 공이 계민의 막사로 직접 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자나깨나 안부를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십시다.

 

제가 북방으로 온 지 이태가 지났지만 오늘과 같이 반가운 손을 맞아보기는 처음이외다.”

을지문덕은 귀유를 관사로 청하여 쾌히 상석을 권하였고, 귀유는 팔을 내저으며 이를 사양하였다.

 

양자가 한동안 설왕설래하다가 하는 수 없이 상석을 비워둔 채로 간단히 차려온 주안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래, 원로에 곡경은 없었습니까?”

“허, 원수를 외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이면 계민의 막사에서 수나라 양광을 조우하였지 뭡니까.

 

그것이 곡경이라면 곡경인 셈이지요.”

“양광을 만나셨다구요?”

문덕이 깜짝 놀라 반문하자 귀유가 태연히 웃으며 돌궐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문덕은 양광이 대원왕에게 입조를 명하는 교지를 내렸다는 말을 듣고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