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단귀유(段貴留) 1
그로부터 며칠 후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은 귀유의 혼인계가 알려지면서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혼인계의 당자인 예원 공주는 식음을 폐하고 앓아누웠고, 건무는 어전에서 물러나오자
장도를 뽑아 들고 귀유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귀유는 이미 왕의 사신으로 장안성을 떠난 뒤였다.
“대체 이놈이 나와 무슨 원한을 졌기에 내 누이를 북방의 오랑캐에게
시집보내려 한단 말인가! 놈을 만나서 어디 그 이유나 들어봐야겠다!”
건무는 분통을 터뜨리며 말 잘 타는 심복을 불러 말했다.
“귀유가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는 지금 당장 의주 야산에 있다는 주괴의 처소로 달려가라.
가서 귀유를 보거든 내가 잠깐 만나보기를 청하더라 하고 변복을 시켜
다시 도성으로 데려오라. 만일 귀유가 반항하거나 응하지 않거든 죽여도 좋다.
뒷일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명을 받은 건무의 심복이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주괴의 처소에 당도해보니
귀유와 주괴는 이미 보이지 않고 도학을 배우는 젊은 문하생들만 내실에 둘러앉아
경을 외고 있었다.
심복이 눈을 감고 앉은 청년들의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마당을 지나 뒤꼍으로 돌아가니
얼기설기 나무로 지은 헛간 안에서 남녀가 희롱하는 소리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누구 계시오?”
심복이 조심스레 인기척을 내자 소리가 뚝 그치고 조금 후에 젊고 얼굴이
해반주그레한 여인 하나가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며,
“뉘시온지요?”
하고 묻는데, 볼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급히 여민 듯한 옷고름 사이로는
언뜻언뜻 속살이 비쳤으며 양어깨에는 지푸라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심복은 그가 주괴의 딸이려니 지레짐작하고,
“주인장 어른은 어디 계신가?”
하며 반말로 물으니 그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제자들 말로는 대궐에서 귀유공이 와서 함께 돌궐로 떠났다고 하는데
저는 친정에 다니러 갔다가 좀 전에야 돌아와 남편이 가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심복의 생각에 그 여인이 딸이 아닌 주괴의 처인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렇다면 안에서 들리던 남자 소리는 누군가 의구심이 생겼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여인의 말투며 억양이 고구려 사람의 것이 아니라
왈칵 수상한 느낌마저 일었다.
“안에 있는 줄을 다 알고 왔으니 어서 나오라고 하시오.”
심복이 발꿈치를 치켜세우고 여인의 어깨 너머를 기웃거리자
여인이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안에는 아무도 없소. 누가 있다고 그러시오?”
제법 살천스레 눈까지 흘기며 황급히 밖으로 몸을 빼내 헛간문을 막아섰다.
이러자 심복으로서는 헛간 안이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봅시다. 아무도 없다면서 왜 문은 막아서시오?”
그가 가깝게 다가서니 여인은 물러서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바람에
한동안 티격태격 시비가 일었는데,
심복이 완력으로 여인을 밀쳐내고 헛간문을 발로 차니
안에 들어앉은 사람은 얼굴이 희고 체격이 건장한 젊은 사내였다.
사내는 웃통을 벗은 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헛간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심복을 보고는 이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 광경을 보자 심복은 한순간에 사정을 훤히 깨달았다.
“이것이 대체 무슨 추행이오?”
그는 짐짓 노한 척하며 여인과 헛간 안의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주괴 어른이 알까 무섭소.
평상에 끔찍이도 부인을 아끼시던 그 분이 이런 망측한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소?”
심복은 주괴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지만 마치 옛날부터 잘 아는 듯이 말하며 두 사람을 꾸짖었다. 사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으나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고,
주괴의 처는 매시근히 고개를 외로 꼬고 섰다가 한참 만에 심복을 올려다보고,
“보지 못한 일로 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복이 즉답을 아니하고 문턱에 퍼대고 앉아서 헛간 안의 사내에게
주괴가 언제 떠났는지를 확인하니 사내가 기어드는 소리로,
“어제 승석 무렵에 떠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심복은 뒤쫓아갈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고 대신 주괴의 처를 보며,
“친정이 어디시오?”
좀 전과는 달리 사뭇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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