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14
그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계해년 이후 백제나 신라와는 군사를 내어 싸운 일이 없으므로 이제쯤은
화친을 말할 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신라가 백제의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양국의 사이가 실로
견원지간과 같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남방과 동맹을 꾀하기로 지금처럼 좋은 때가 다시없거니와,
만일 전하께서 백제와 신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와 수교하여 지낸다면
과연 어느 나라를 택하시겠나이까?”
귀유의 돌연한 질문에 왕은 깊이 생각하고 나서,
“신라야 본시 동남방의 오랑캐들이니 상접하여 지낼 마음이 있을 리 없으나
그래도 지금 백제국의 부여씨들은 전날 십제 왕실의 후손으로 우리 시조대왕이신
동명성왕의 핏줄이 아닌가?
요동의 영웅 담덕대왕께서도 바로 그런 까닭에 부여씨들을 용납하였던 것이니
내 어찌 선대왕들의 유지를 헤아리지 않겠는가?”
하며 뜻이 백제에 있음을 말하였다.
귀유가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과연 현명하신 지적입니다.
천륜의 도리를 봐서도 그러하나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서도 신라보다는
백제와 화친하는 쪽이 천번 만번 지당한 일입니다.
비록 무오년에 백제가 수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향도를 자청함으로써
전하의 노여움을 산 일이 있으나 그것은 부여창이 보위에 있을 때의 일로,
그 뒤 사비에서는 임금이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오가는 인편과 풍문에 듣자건대 금왕인 부여장은 나이가 젊고
그 됨됨이가 제법 반듯하여 함께 대사를 의논할 수 있는 인물인 듯합니다.
더욱이 그는 전왕들의 치세를 못마땅히 여겨 등극하자마자
전조의 녹봉을 받았던 늙은 신하들을 일제히 몰아냈고,
신라왕 백정과는 구생지간(舅甥之間)이나 서로 군사를 내어
혈투를 벌일 만치 사이가 좋지 못합니다.
백제의 장왕이 수나라에 대해선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듣지 못했지만
그가 즉위하여 육칠 년이 지나도록 백제의 사신이 수나라에 조공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은 바가 없으므로 필시 향도를 자청했던 부여창과는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왕은 귀유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남역의 대부분은 지금 신라가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히 화친의 상대를 고르자면 백제입니다.
또한 신라와 화친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백제는 동남의 왜국과도
철마다 사신을 보내어 교류하고 우애하며 지내는 것이 마치 한나라와 같으므로
백제를 사귀면 왜국까지 능히 우방으로 삼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북방으로 돌궐과 거란, 말갈을 얻고 남으로 백제, 왜국과 연합한다면
제아무리 양제라 하더라도 요동으로 감히 군사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경의 말을 듣고 나면 언제나 내 가슴이 후련하도다!”
왕이 탄복하며 칭찬하자 귀유가 침착한 소리로 물었다.
“요서의 대방군에는 전날 외백제의 유민들이 군락을 이루어 살고 있어서
사비로 가는 배편을 어렵잖게 구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허락하신다면 이번에 돌궐로 사신을 보낼 때
그로 하여금 백제까지 둘러서 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
“한데 아까도 말했지만 이처럼 막중한 일을 맡길 만한 사신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왕이 근심 어린 낯으로 반문하자 귀유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스승 주괴와 동반하여 다녀오겠나이다.”
하고 말했다.
“경이 직접 험지를 가겠다고?”
대원왕은 크게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치 않은 소리다. 경이야말로 과인에게는 보배와 같은 사람이요,
본조에는 없어서 안 될 지신이자 책사가 아닌가?
계민의 마음도 알 수 없는 바이거늘 하물며 사비까지 들어갔다 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릇 길은 또 얼마나 멀고 험하냐?
내 아무리 부덕한 군주라고는 하나 경과 같은 인재를 사지로 보내지는 않겠다!”
임금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으나 귀유가 계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백제의 군신들과
상대하여 동맹의 진의를 설명할 적임자가 자신밖에는 없다고 강조하면서,
“뿌린 자가 거두게 하여주옵소서.
신의 세 치 혀로 기필코 원하는 바를 얻어서 돌아오겠나이다!”
하며 뜻을 굽히지 않으니 나중에는 왕도 하는 수 없이 이를 허락하게 되었다.
귀유가 굳이 사신을 자청한 까닭은 따로 있었다.
조정에 있어봐야 남진파들의 집중 공격을 면하기도 어려울 테지만
필시 예원 공주의 일로 좌장군 건무의 원심을 살 일이 두려웠던 것이다.
계민에게 예원 공주를 바쳐 환심을 사려는 혼인계가 알려지면
건무가 자신을 잡아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설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귀유는 주괴와 더불어 돌궐로 가서 혼인계를 성사시킨 다음
주괴만 고구려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금주에서 배를 타고 내처 백제로 갔다가
모든 상황이 가라앉고 난 뒤에야 귀국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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