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12
귀유는 천천히 입을 열어 사본과 맹진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양제가 돌궐을 치려던 20만의 군사로 우리를 칠지도 모른다는 사본의 우려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공연한 걱정입니다.
양제의 아비 문제가 이미 30만 대병으로 실패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20만마저도 동서로 나뉘어 북방을 공략하고 있으므로
그들로선 결코 요하를 건널 수가 없는 일이옵니다.
또한 맹진이 말한 포의지교의 아름다움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순진한 선비의 한가로운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매사에는 전조와 징후라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제방을 쌓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현명한 이는 달무리가 서거나 개미떼가 거동하는 것을 보고
미리 폭우에 대한 방비를 하는 법입니다.
양제가 남방과 서방을 아우르고 이제 북방으로 군사를 내었으니
다음에 칠 곳은 바로 우리 고구려올시다.
이것은 그가 보위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만방에 공언해온 일이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고,
다만 우리를 치자니 아직 그 힘이 미약하여 시일을 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맹진의 말한 바와 같이 양제는 과연 황하에서 장강에 이르는 대운하를 완공하고,
유림에서 이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으므로 안으로는 사람들이 지쳐 있고 국고는 바닥이 나서
당분간은 대병을 일으킬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때 우리가 군사를 내어 계민을 원조한다면 세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방과 맺은 신의요,
둘째는 우방이며,
셋째는 우리나라에 대한 양제의 두려움입니다.
북방이 함락되지 않는 한 양제는 감히 동으로 군사를 내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돌궐을 지키는 것은 곧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도리어 지금은 양제의 야욕을 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계민을 도와 수의 군대를 물리친다면 그 위용을 등에 업고 비로소
신라나 백제와도 합종연횡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대왕께서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마옵소서.”
그러나 귀유의 간곡한 말에도 대원왕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귀유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수나라 군대와 대적해 싸우자니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흔들리는 왕의 마음을 제일 먼저 간파한 이는 이복 아우 건무였다.
그는 도리어 역설을 펴서 왕의 불안함을 더욱 부추겼다.
“귀유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그가 심산에서 도술을 배우고 필시는 양제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틀림없습니다.
전하께서는 귀유의 도술을 믿고 원군을 내어 계민을 도우십시오.
만일 일이 잘못되어 수나라가 요동으로 군사를 돌리더라도 전하께서는
오직 귀유를 보내어 막으면 될 것입니다.
남의 마음속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 신통한 귀유가 있는데 무엇을 더 근심하오리까.”
건무의 빈정거리는 말을 듣자 노장 고승이 역시 빈정거리는 투로,
“양제의 마음을 읽는 귀유가 있고, 혼자서도 능히 백만대군을 당할 을지문덕이 있으니
전하께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실 일이 없습니다.
부디 심기를 편안히하옵소서.”
하고 거들었다. 대부분의 조정 중신들은 원군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는
남진파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귀유의 뜻을 존중해 말한 자로는 겨우 막리지이자
서부 욕살인 쉰줄의 연태조가 있었을 뿐이었다.
연태조는 주변국과 제휴하여 수나라에 대항해야 화를 피할 수 있다는 귀유의 논지를
적극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건무가 정색을 하며,
“하면 막리지께서 뒤에 일어날 모든 일을 감당할 테요?”
하고 물었을 때는 침묵을 지킬 뿐 대답이 없었다.
연태조는 무오년의 일로 이미 장년의 소신과 혈기가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그를 제외한 5부의 욕살들도 한결같이 남진파와 뜻을 함께하였다.
대원왕은 결단의 순간에 귀유의 말을 좇지 않았다.
양제에 대한 두려움과 남진파의 등등한 기세에 밀려 계민에게 글로 말하기를,
뜻은 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아니하여 원군을 파견하지 못하니
모쪼록 사직을 보전하여 후일을 도모하자고 둘러댔다.
그나마 남진파의 주장대로 계민의 사신을 참수하여 양제에게 보내지 않고
목을 붙여 되돌려보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귀유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왕명이 내리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도 홀로 편전에 엎드려
이마를 땅에 짓찧으며,
“신 중외대부 단귀유, 전하께서 재량하여주실 것을 신명을 다해 간곡히 아뢰옵니다.
이제 북방의 돌궐마저 수에 복속되고 나면 양제의 야욕은 단불에 기름을 끼얹듯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을 것입니다.
그의 오만하고 방자한 것을 어찌 보아 넘기겠나이까?
만일 그가 대왕 전하로 하여금 수나라에 입조하여 친히 조회할 것을 요구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또 어찌하오리까?
이제 동맹은 모두 끝나고 우방도 사라졌습니다.
지금 공세를 취하여 양제의 기세를 꺾어놓지 못하면 양제는 돌궐을 아우르는 순간
그 다음으로 우리를 생각할 것입니다.
거듭 아뢰거니와 합종연횡의 진적한 뜻은 싸움을 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양제에게 두려움을 주어 쓸데없는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미연에 막자는 데 있습니다.
이때 양제를 누르지 못하면 반드시 멀지 않은 날에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뒷날 원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부디 신의 말하는 바를 깊이 헤아려주사이다!”
하고 눈물로 호소하였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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