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8
왕이 사신을 따라 입궐한 귀유를 보았다.
자그마한 키에 얼굴에는 영리한 꼴이 졸졸 흐르고 눈빛은 형형하여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푸른 빛이 돌 정도여서 한눈에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귀유가 절하고 자세를 고쳐 앉자 왕은 용안에 희색이 만면하여 은근한 말로
단향의 수완과 나라에 끼친 공덕을 추켜세우고 나서,
“이제 짐은 그대의 지모와 경륜을 나라에 쓰고자 한다.
조정에는 오래전부터 남벌을 주장하는 무리와 북진을 말하는 무리가 양편으로 나뉘어
공론이 시끄러운 마당인데 항차 근년에는 수나라 왕실에 변고가 일어 문제의 아들 양광이
부형을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양광이란 자는 입을 달고 세상에 나온 이래 틈만 있으면 요동 정벌을 새처럼 지저귀던 자요,
따라서 우리가 제아무리 조공을 바치고 수나라를 섬긴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트집을 잡아
요수를 건너올 터라 짐과 조정의 근심이 오직 여기에 있다.
귀유는 부디 지혜를 다하고 묘책을 말하여 짐의 근심하는 바를 없애달라.
나라의 6백 년 사직이 그대의 손에 달렸다.”
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귀유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두운 방에서 글귀나 읽은 처지로 어찌 막중한 국사를 입에 담겠습니까마는
대왕께서 특별히 소인의 생각을 하문하시니 어전이라 여기지 않고 시중 사첫방의
객담삼아 함부로 말씀을 올리겠나이다.”
“무슨 말이든 어려워하지 말고 하라.
설혹 너의 입으로 나를 욕한다 하더라도 결코 이를 허물로 삼지 않겠노라.”
“황송합니다.”
귀유가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소인의 생각에 그간 국사에는 세 가지 큰 과실이 있었나이다.
지난 무오년에 막리지 연태조가 요하를 건너가서 영주총관 위충을 친 것은
돌궐의 세력을 얻어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수의 문제가 대병을 움직이는 바람에 이 일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대병 30만이 대부분 패하여 물러간 뒤로 연태조가
다시 요하를 건너려는 것을 나라에서 막았으니 이것이 첫째 과실입니다.
문제가 영주총관 따위에 30만이나 대병을 움직인 것은 우리가 동돌궐과 연횡하려는
바를 알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수나라에 얼마나 큰 위협인지를 깨달은 탓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공세를 취해 돌궐과 연횡을 이루었어야 양광 따위가
우리나라를 넘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귀유의 거침없는 직언에 대원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무오년에 수의 대병을 물리친 직후 우리나라 군사들은 가히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충만하여 있었사온데, 이를 국력으로 삼지 못하고
도리어 군사를 돌려 백제를 친 것이 두번째 과실이었습니다.
범을 잡으라고 보낸 포수가 거의 범을 다 잡았을 때 돌연 토끼를 잡으라고 한다면
맥이 빠져 잡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 이치올시다.
이는 병법에도 있는 일로, 약한 군사와 싸워 이긴 군대로는 강한 군사를 칠 수 있지만
강한 군사와 싸우던 군대를 약한 곳으로 보내지는 않는다고 하였나이다.”
“계속하라.”
왕은 이번에도 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귀유가 여전히 낭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백제를 쳤으면 신라와 화친을 도모하거나,
신라와 싸우려면 백제와 선린의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데,
양국을 번갈아 쳐서 두 쪽 모두를 종작없이 적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이 또한 예삿일은 아니올시다.
두 나라를 한꺼번에 토벌할 지략과 힘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한 나라와는 반드시 화친을 꾀하는 것이 옳습니다.
보십시오.
결국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온통 적들에게만 둘러싸여
오히려 화를 없애려다가 도리어 화를 입는 포신구화(抱薪救火)의 형국이 되어버렸고,
만일 백제나 신라가 수나라와 공모하여 양쪽으로 협공을 취해 오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실로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이 세번째 큰 과실이올습니다.”
왕은 귀유의 지적에 서서히 안색을 붉혔다.
백제나 신라가 수와 공모하여 양쪽에서 군사를 낼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즈음 고구려왕 대원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너의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구나.
그런데 그같은 과실을 볼 줄 알면 이를 바로잡을 계책 또한 너의 수중에 있을 것이 아니냐?
이제 과인에게 그것을 말하라.”
“저의 머릿속에 든 것을 아뢰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나
이것이 만일 조정 대신들에게 알려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십상팔구 양론이 상충하여 어전이 시끄러워질 것이고
저를 모함하거나 탄핵하는 말도 조석으로 횡행할 것이 불을 보듯 합니다.”
“어전이 시끄러운 것은 너의 걱정할 바가 아니요,
설혹 너를 모함하는 말이 나돌더라도 내가 이를 듣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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