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3
그런데 이보다 앞서 헌이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은 무더운 부남의 담로지였다.
이 무렵 부남의 담로국 제후는 성왕의 아우 부여윤의 아들인 서(瑞)였다.
윤과 서 부자가 차례로 맡아 다스리던 부남에는 전날 중국의 백제 담로국들이
망할 때 피신한 부여씨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고,
부여청도 그 피난민의 후예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청은 광릉군에 숙위하던 부여지의 서손(庶孫)으로 서력 580년,
광릉이 진나라에 병탄될 때 일가를 따라 부남으로 옮겨 왔는데,
이때 청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 후 청이 차차 나이를 먹어가며 일가 가운데 엇비슷한 또래의
흑치라는 소년과 자주 어울려 놀았다.
두 소년이 말을 타고 창이나 칼로 무예를 겨루면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저잣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또한 그들은 강에 가면 다 자란 악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고,
숲에서 범을 만나면 아가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개 다루듯 할 정도로
신통한 구석들이 있었다.
그런데 흑치의 일가도 본래는 왕족 부여씨였으나 동성대왕 시절
덕솔 벼슬에 있던 흑치의 조부 문대(文大)가 부남의 담로지
흑치국(黑齒國)의 제후로 봉해지는 바람에
흑치 집안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흑치국에 살던 사람들은 ‘삘랑’이라는 나무열매를 즐겨 먹는 탓에
대부분 치아 빛깔이 거무스름했다.
부여청과 흑치가 자라 20세가 되자
부남을 다스리던 서가 이들을 데려다가 관직을 맡겼는데,
청에게는 문관의 일을 보게 하고 흑치에게는 군사의 통솔을 맡겼다.
흑치에게는 사차(沙次)라는 이름이 따로 있었으나
부남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모두 흑치 장군이라 불렀다.
부여헌이 부남땅을 찾아가서 제일 먼저 부여서를 만나 본국 장왕의 뜻을 전하고
청과 흑치를 데려가려고 하였더니 육순이 넘은 늙은 서는 죽은 백부의
해묵은 원한을 갚는 일에 별반 관심이 없어,
“신왕의 뜻은 좋으나 그렇다고 이곳의 인재를 빼내 가면 어찌하나?
청과 흑치는 여기서도 중히 쓰는 사람들이니 주기가 어렵네.”
하며 고개를 저었다.
본래 백제의 국법과 관례에 따르면 담로국의 제후들에게도 내국과 한가지로
3년의 임기가 있었으며, 임기를 마치면 본국 왕의 결정에 따라 유임이 되거나
혹은 임지를 바꾸어야만 했다.
그러나 위덕왕 재위 시절 중국 동안(東岸)의 외백제가 모두 망하면서
이 원칙도 자연히 흐지부지되었고, 담로국 제후에게 미치는 본국 왕의 권한도
덩달아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부여헌이 며칠을 두고 서에게 간곡한 말로 거듭 청을 하였지만 서가 끝내 응하지 않아
바이 난감해 있던 차에 흑치의 아버지 덕현(德顯)이 소식을 듣고 헌의 숙소를 찾아왔다.
덕현이 헌과 더불어 담소하며 특히 장왕의 인품과 됨됨이를 꼬치꼬치 캐어물으니
헌이 대답하기를,
“제가 누구입니까? 저로 말하면 부여 왕실의 적통인데 한낱 경사의 조롱거리였던
마동 왕자가 보위에 올랐으니 어찌 이를 용인할 것이며,
마음으로 탐탁하게 여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오나 저는 하늘에 맹세컨대
금상 전하를 깍듯이 형님으로 뫼실 뿐 아니라 늙어 죽을 때까지
충절을 다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금상의 인품이며 됨됨이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하며 왕의 도량이 넓은 것을 말하였다.
헌의 단아한 외모와 조리 있는 언변에 이미 마음의 절반이 기운 덕현인데,
이어 헌의 입을 통해 장왕이 좌평 세 사람의 목을 칠 뻔했던 일이며,
서랑 개보와 덕솔 해수를 단번에 좌평으로 삼았다는 말과,
또한 군사를 내어 신라와 교전했다는 얘기 따위를 듣자 크게 흡족해하며,
“왕제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더 의심할 바가 없소이다.
지금 백제의 유민치고 본국이 예전처럼 강성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소?
본국은 해와 같고 담로국은 달과 별이라,
하늘의 해가 밝고 뜨거워야 달이며 별도 제 빛을 발할 수가 있을 것이오.”
하고서 사뭇 음성을 낮춰,
“이곳의 일은 내가 모다 뒤책임을 질 터이니
내일 날이 밝거든 두 젊은이를 데리고 서둘러 떠나시오.”
하고 말했다.
그런데 덕현이 돌아가고 얼마 아니 있어 청과 흑치가 말을 타고 와서,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소.
길이야 아는 길이니 기왕 갈 거면 하루라도 빨리 갑시다.”
하며 재촉하여 삼자가 그날 밤길을 도와 부남을 떠나게 되었다.
왕은 헌을 포함하여 여섯 사람의 부여씨 족친들을 보자
입이 절로 벙그러져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였다.
곧 헌을 가까이로 불러 손을 맞잡고 그간에 여러 담로지를 돌아다니며
고생한 것을 침이 마르도록 치사한 뒤에 좌우에 명하여 주연을 준비하라 일렀다.
연회가 시작되자 왕은 족친들에게 일일이 잔을 권하며 식구들의 안부를 묻고
대업을 위해 흔쾌히 귀국해준 것을 고마워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주연은 밤낮 없이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만취한 장왕은 시종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나 기뻤던지 심지어 그는 전날 금성의 아이들에게 지어 가르쳤던 노래를
스스로 소리 높여 부르며 여흥을 돋우기까지 하였다.
연회가 끝나자 여섯 명의 족친들에게는 각기 벼슬이 내려졌는데,
아직 각자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은 마당이라 촌수의 가까움과 연륜의 서열을 따랐다.
먼저 자신의 이복 동생인 부여헌에게는 달솔 벼슬을 제수하여 전내부의 일을 보게 하였고,
굴안과 망지, 사걸에게는 은솔 벼슬을 내려 병부의 장수로 삼았다.
또한 문무를 겸전한 부여청에게는 덕솔 벼슬을 제수하여 내경부의 일을 맡겼으며,
그를 따라온 흑치사차도 덕솔 벼슬과 함께 사군부의 장수로 삼아 휘하에
1천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아울러 왕은 이들 모두에게 전지와 주택과 노비를 하사해 본국에서 살아갈
생활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외지에 살던 부여씨들이 장왕의 백제 왕업에 동참한 바로 그 해에 중국 수나라에서는
문제 양견의 아들인 양광(楊廣)이 부형(父兄)을 한꺼번에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변란이 일어났다.
양광은 지략이 있으나 성질이 포악하며 야심이 대단한 인물로 그 아비 양견과는
기미가 상반하였는데, 수나라가 무오년에 30만 대병을 움직여 고구려를 쳤다가
실패한 뒤로 다시 군사를 내지 않는 것에 특히 불만이 심하였다.
그는 수나라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까닭을 자신의 아우 양량의 탓으로 믿고
매양 양견에게 군사를 새로 일으켜 자신을 원수로 삼을 것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이미 고구려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 양견이 좀체 허락하지 않으니
이를 기화로 부자간에 틈이 생겼다.
양광은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서역과 월주, 북의 돌궐과 강, 저족들이 세운 주변국을 모조리 힘으로 통합하려는
거대한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그런 양광의 눈에 고구려 따위를 두려워하는 아버지 양견은
늙고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양광은 양견에 대한 반감을 감춘 채 오히려 더욱 철저히 자신을 위장했다.
양견의 장자인 태자 양용(楊勇)이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음탕한 음악을 즐겨 듣자
자신은 첩들을 몰래 감추고 겉으로는 소비(蕭妃) 한 사람만을 두었고,
늙은 하녀가 일하는 허름한 집 한 칸을 구하여 검소하게 살면서 먼지가 쌓인 악기를
한쪽 구석에 놓아두고 자신은 마치 음악을 즐기지 않는 것으로 꾸몄다.
그는 또 자신이 유능한 선비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했으며,
찾아오는 손님은 소비와 더불어 몸소 맞아들이고 돌아갈 때는 집 밖으로 나가 배웅하였다.
아울러 하루도 빠짐없이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을 드리고 극진히 부모를 섬기는 체하여
급기야는 양견 내외의 신임을 톡톡히 얻었는데,
그 처신이 얼마나 주도면밀했으면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궁중의 나인,
심지어 노비들까지도 그 덕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자연히 태자 양용의 자리가 흔들리자 양광은 기회를 보아 그 자리를 빼앗았고
드디어는 갑자년(604년)에 이르러 형인 양용과 아버지 양견을 한꺼번에 죽이고
제위를 찬탈해 수나라 두번째 황제에 올랐다.
양광, 그가 곧 수양제(隋煬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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