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2
“지금 왕실의 족친들은 전하의 곁에 머무르는 것이 해가 될 자들과
전하를 보필하여 나라에 득이 될 자들로 크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저희와 같은 것들은 곁에 있어봤자 결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자들입니다.
도움은커녕 도리어 심기만 어지럽힐 따름입니다.
그런데 전날 곤륜에서 아버지와 숙부가 서로 만나시면 매양 말씀하시기를,
부여숭 어른의 삼자이신 굴안(屈顔)과 자실의 삼자인 망지(望地),
그리고 부여지(扶餘旨)의 후손인 청(淸)과 그가 데리고 있는 흑치(黑齒) 등은
한결같이 문무를 겸전한 뛰어난 인재들로 모다 백제인의 자랑거리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탄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나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희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다시 곤륜으로 보내주시고 대신에 이들을 불러들여 왕업을 찬란히 꽃피우소서.
하면 백성들도 전하를 흉보거나 나무라지 않을 것이옵니다.”
장왕은 자신의 심중을 환히 꿰뚫어보듯 하는 이복 아우 헌의 말에 사뭇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는 본시 옹졸한 인물이 아니었다.
곧 용안을 부드럽게 하여 이르기를,
“알았다. 그것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라.
내 선부에 명하여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배를 준비해놓을 터이니
채비를 마치면 일러다오.”
하고서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러나 너를 곤륜으로 보내자니 실로 허전하고 아까운 생각이 드는구나.
굳이 가겠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만, 어떻게든 고구려와 신라를 쳐서
누대에 걸친 왕실의 원한을 풀려는 과인의 뜻을 너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의 조상이 같을진대 이는 우리 두 사람 모두의 일이 아니겠느냐?”
하며 부여헌을 바라보았다.
“만약 나를 도와 사비에 머물겠다면 너에게 벼슬을 내리고 늘 가까이에 두어
살뜰한 형제지정을 나누고 싶다.
또한 방금 네가 말한 외지의 족친들도 너의 힘을 빌려 사비로 청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싶구나.
당장 대답을 듣지 않아도 좋으니 너는 이 형의 말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어마마마와도 잘 상의하여 떠나기 전까지 내게 대답을 달라.”
장왕의 다정하고 은근한 부탁에 헌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가 어전을 물러나 법왕비를 찾아가서 일이 잘 처리됐음을 알리자
법왕비는 크게 기뻐하며 그날로 당장 짐을 꾸렸다.
이튿날 다시 헌을 앞세워 왕에게 채비가 끝났음을 고하니
왕이 친히 법왕비를 찾아뵙고 노자를 넉넉히 내어놓을 뿐 아니라
눈물까지 흘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하였다.
그때까지 마음속으로 심히 갈등하던 헌이 이 모습을 보자 불현듯 엎드려 말했다.
“제가 어제 형님께서 하신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았사온데 미력을 다하여
그 뜻을 받들겠나이다.”
법왕비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헌의 다른 형제들은 왕과 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는데,
오직 왕만이 흡족한 낯으로 어려운 결정을 했노라며 헌을 칭찬하였다.
헌이 연하여 고하기를,
“어차피 외지의 족친들을 데려오자면 제가 나라 밖으로 나가야 할 터이니
어머니를 모시고 곤륜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남과 남령을 거쳐 수나라로 들어가
내주에서 배를 타고 다시 오겠습니다.”
하므로 왕이 별도로 노자를 푼푼이 주고 원로의 횡액과 흉변을 걱정하여
무사와 종 몇 사람을 데려가도록 하였다.
이렇게 떠난 부여헌이 다시금 사비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제법 시일이 흐른
갑자년(604년) 늦봄이었다.
헌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장왕은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친히 대궐 앞에까지 행차하여 아우를 맞아들였다.
이때 헌을 따라온 사람은 모두 다섯이었다.
먼저 굴안이란 자는 위덕왕의 셋째 아우 부여숭의 삼자로 나이가 마흔둘이요,
그 이름처럼 얼굴이 길고 턱뼈가 약간 구부러졌는데,
키가 7척에 눈이 크고 손 하나가 열 식구 밥 지어 먹을 솥두껑만해서
한눈에 힘깨나 쓸 장사로 보였다.
굴안이 본래 요하의 담로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위덕왕 재위 시절
그 아버지 부여숭이 고구려 평원왕의 침략을 받고 조선과 낙랑, 대방의 땅을 모두 잃게 되자
중국의 동안을 따라 내주로 옮겨와 살았다.
그러나 이내 북주의 무제에게 내주마저 내어주고 다시 남향하여 장강 이남의 광릉에 이르렀는데, 이마저도 진나라에 병탄된 것이 굴안의 나이 스무 살 적의 일이었다.
굴안이 그 아버지 부여숭을 따라다니며 광활했던 외백제의 몰락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한 셈이었다. 그 후 요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유민들이 모여 살던 백제촌을 전전하다가 수나라가 진나라를
아우를 때 수나라의 장수가 되어 무공을 세웠고, 그 덕택으로 낙양 근처의 2백 호 남짓한
현령 자리 하나를 제수받아 그럭저럭 지내고 있었는데, 홀연 부여헌이 찾아와 백제 부흥을
도모하는 장왕의 뜻을 전하자,
“이는 내가 꿈에서조차 바랐던 일이다.”
하며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따라 나서게 되었다.
부여망지는 성왕이 후궁의 몸에서 본 자실의 아들로 역시 남령의 담로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인데 서른여섯의 한창 나이였고, 그와 동반하여 온 부여사걸(扶餘沙乞)은
자실의 아우 용남의 아들로 망지보다 한 살이 어렸다.
헌이 남령을 찾아가 자실의 집에서 망지를 만날 적에 마침 용남이 그곳에 다니러 와 있었는데,
본국의 장왕이 나라의 원수를 갚고 구토를 회복할 뜻이 있다고 하자 용남이 크게 기뻐하며,
“우리 형제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금상께서 하려는 것이니 어찌 자식된 도리로 보고만 있겠나.
관산성에서 처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 성왕의 일을 생각하면 요즘도 나는 밤잠을 설친다네.”
하고서 자신의 다섯 아들 가운데 특별히 천거한 이가 넷째 사걸이었다.
용남이 사걸을 말할 때 그 기상이며 무예를 자주 망지에 견주고,
“데려가서 득이 되면 되었지 해는 없을 것이네.”
하니 망지 또한 사걸의 무예가 자신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높여 말하므로 함께 귀국선을 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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