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전운(戰雲) 4
문제가 죽고 양제가 등극한 수나라 정변에 누구보다 촉각을 곤두세운 이는
고구려왕 대원(大元:창陽王)이었다.
대원왕은 인내심이 뛰어나고 지모가 있었으며 학문을 좋아했으나 지나칠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순하여 신하들이 답답해할 때가 많았다.
그는 장장 스물다섯 해나 태자로 있으면서 선왕이 정사를 펴는 것을 늘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즉위 초부터 줄곧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을 덕치의 으뜸으로
꼽아온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수나라가 무오년에 30만 대병을 움직여 침공해 들어오자
커다란 충격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록 천우신조가 있어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그 뒤로 수나라만 생각하면 늘 심기가 편치 못했다.
그런데 수나라와 벌였던 무오년의 마찰은 시일이 흐를수록 고구려 조정에 두 가지의
상반된 여론을 형성해나갔다.
수도인 남평양 장안성의 나이 많은 대신들과 문관들은 대병을 움직인 수나라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가일층 몸을 낮추어 수를 상국으로 섬겨야 한다고 극간한 반면,
막상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장수들은 중원을 통일한 막강한 수나라 세력이 정작 겪어보니
별것이 아니더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수나라를 두려워하던 이들은 장수대왕조의 일을 예로 들며
북화남진(北和南進:서화남진이라고도 함)을 말하였고,
몇몇 젊은 장수들은 남쪽의 땅이 협소하고 백제와 신라의 세력이 가히 위협적이지
못한 것을 들어 남수북벌(南守北伐:남수서벌이라고도 함)을 주장하였다.
북진파와 남진파의 대립은 기실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이 무렵 고구려 북방에는 수나라말고도 말갈과 거란, 돌궐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말갈국은 고구려 세력권에 완전히 복속되어 있었지만 요하 부근의 거란국이나
몽고의 돌궐국은 시류에 따라 그 태도를 달리 하였고,
특히 북방 유목민을 규합해 대제국을 건설한 돌궐은 고구려나 수나라에 비견할 만큼
번창한 세력을 구가하면서 중국 쪽의 동돌궐과 천산(天山) 방면의 서돌궐로 분립해 있었다.
고구려의 북진파는 수나라를 막기 위해 바로 이 동돌궐과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다.
북진파의 중심 인물은 나라의 상신인 막리지 연태조란 이였다.
고구려에는 본래 개루부, 관나부, 절나부, 연나부, 순나부로 불리던
다섯 개의 대부족 집단이 있었고 그 부족장을 일컬어 5부 욕살(五部 褥薩)
또는 대인(大人)이라 칭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왕권을 떠받치는 토호 세력이었으며
부족장인 욕살의 지위도 대를 물려 세습되었다.
나라의 초기에는 부족장의 지위가 더러 왕의 그것을 능가할 때도 없지 아니하여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같은 이는 차대왕(次大王)이 악정을 펴자
왕을 죽여 갈아치운 일도 있었다.
연태조 역시 바로 이 연나부(서부) 사람으로,
그는 광(淵廣)의 손자이자 자유(淵子遊)의 아들이었는데,
대대로 막리지를 지내는 한편 연나부를 통솔하는 서부 욕살직을 겸하고 있었다.
대원왕도 즉위한 초입에는 북진을 주장하는 연태조의 뜻에 동조하여 수나라를 경계하고
동돌궐과 제휴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동돌궐과 제휴를 하자면 요수를 건너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연태조가 말갈군 1만여 명을 동원하여 동돌궐로 가는 길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
무오년에 수나라가 30만 대병을 움직인 까닭이었다.
무오년의 일은 잠시나마 수나라에 대항하려고 했던 대원왕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놓았다.
북진파의 위세가 꺾이는 틈을 타고 고구려 조정에서는 좌장군 건무(建武) 등을 중심으로 한
남진파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다.
건무는 평강왕이 후비의 몸에서 본 아들로 대원왕의 배다른 아우였는데,
연태조와는 왕의 신임과 나라의 권력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왕의 심기를 간파한 건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정의 대신들과 문관들을 규합하여
어전에서 북화남진을 공론화시켰다.
수나라에 향도를 자청한 백제의 소행을 들어 이제 막 전장에서 돌아온 피곤한 군사를
곧바로 남향시킨 것도 그였다.
이를 기화로 건무는 연태조의 심복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고 왕의 마음과 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왕은 건무를 비롯한 남진파의 의견을 수용하여 무오년 이후 해마다 수에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거르지 않는 한편 백제와 신라가 모산성에서 싸웠다는 말을 듣자
당장 그 이듬해 장군 고승과 온달 등을 내어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고구려는 별소득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평강왕 때 요동에서 북주의 군대를 대파했던 백전노장 온달마저 잃고 말았다.
대형 벼슬을 지내던 온달은 평강왕의 사위이자 대원왕에게는 막냇누이의 남편이었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전지로 떠나며 임금에게 맹세하기를,
“지금 동이(東夷:신라)가 빼앗아 자신들의 군, 현으로 만든 한수 이북 땅은 본래 우리 영토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늘 이를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신은 편모 슬하에 가진 것 없는 가난뱅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늘 바보 온달로 불리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으나 요행히 나라의 사위가 되고 또한 장수로 뽑혀 양대에 걸쳐
과분하기 짝이 없는 성은을 입었나이다.
지금 죽더라도 무슨 여한이 있겠나이까.
이번에 나가서 계립현과 죽령 이북의 땅을 모두 우리 땅으로 되돌려놓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아단성(阿旦城:충북 단양)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온달이 한수(한강) 지역의 신라군을 피해 험난한 소백산맥을 타고 남하하는 사이에
고승은 다른 군사들로 한산주(서울)를 공격해 신라군의 발을 묶어놓았다.
이같은 양동 작전은 고구려가 흔히 쓰던 전법이었다.
그러나 평양을 떠난 뒤 맞서는 전쟁마다 승승장구하던 온달은 애석하게도
그만 아단성에 이르러 신라 명장 이리벌이 쏜 화살에 심장을 맞고 진중으로 옮겼으나
곧 숨을 거두었다.
명장 온달의 죽음으로 고구려군의 예기도 아단성에서 꺾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했다.
고구려 군사들은 온달의 시신을 관에 넣고 장안성으로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그가 도성을 떠나며 임금께 맹세한 대로 시신을 넣은 영구가 땅에 붙어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장안성에서 비보를 접한 평강왕의 막내공주는 황급히 아단성으로 달려와 통곡하며
남편의 관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갈려 판가름이 났습니다.
생전의 한을 풀고 그만 집으로 돌아가십시다.”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 말하니
그제야 땅에 붙었던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왕은 이 말을 듣자 즉시 군사를 물리고 용포가 젖도록 눈물을 쏟으며 슬픔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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