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6
선수를 뺏긴 길지는 양팔을 허우적대며,
“저 사람이, 저 사람이……”
연신 발을 굴러대고, 시립한 중신들은 왕과 문진을 번갈아 바라보고,
왕은 잠자코 웃기만 하였다.
문진이 말 한 필을 잡아타고 창을 꼬나든 채 해수가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나가
마상에서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하며,
“일찍이 장군의 이름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한수 배우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합니다.”
하니 해수 또한 문진을 모르지 아니하여,
“그대가 전날 백기와 자웅을 겨루었던 연문진이던가?”
알은체를 하고서,
“어디 마음껏 공략을 해보라.”
한 손으로 장창을 비껴 잡고 의연한 태도로 일렀다.
본래 봉술에 능한 문진이 현란한 솜씨로 창을 휘두르며 말을 짓쳐 달려들자
해수 또한 말에 박차를 가하여 성성한 기세로 문진과 어울렸다.
문진이 말머리를 오른편으로 몰아붙이며 몇 차례 창 끝으로 해수를 공략하니
해수가 덩달아 말 꼬리를 잡고 같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가볍게 이를 막았다.
삼사 합 거듭되는 문진의 공격을 막아내던 해수가 돌연 말머리를 잡아채고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공세로 돌아서자
이번에는 문진이 같은 방향으로 돌며 해수의 창 끝을 막아내는데,
양손을 자유자재로 쓰는 해수에 비해 오른손잡이인 문진이 약간 수가 밀렸다.
이에 문진이 다시 말머리를 잡아채며 오른편으로 돌려고 하였는데
이를 간파한 해수가 좀처럼 틈을 열어주지 아니하자
마침내는 문진의 말이 원을 벗어나 잠깐 싸움이 그치게 되었다.
해수가 껄껄 웃으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더니 자네의 창술이 고작 그것이던가?”
하고 빈정거리자 잔뜩 약이 오른 문진이 대꾸도 안하고 다시 말을 짓쳐 들어갔다.
양자가 말머리를 어우르고 10여 합을 겨뤘으나 이번에도 문진이 먼저 등을 보이고
몸을 피하자 그때까지 구경하던 길지가 맹렬한 기세로 말을 몰고 나오며,
“아우는 그만 물러서게나!”
하고는 그대로 해수에게 달려들었다.
몸이 풀린 해수가 길지를 상대하여 화려한 창술을 자랑하며 공격해 들어오니
길지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날렵한 솜씨로 이를 막아내었다.
양자가 교전한 지 10여 합이 지나도록 우열을 논하기 힘든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해수는 과연 백제 최고 장수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합이 거듭될수록 예리한 기운을 잃어가는 길지의 공세와는 달리 해수의 창 끝은
오히려 점점 매섭고 날카롭게 변해갔다.
해수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길지를 공략하자
마침내 길지가 견디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물러났다.
잠시 쉬고 있던 문진이 이 모습을 보자 돌연 고함을 지르며 해수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들었고,
길지 또한 문진과 합세하여 해수를 공격하니 해수가 두 사람을 양쪽으로 상대하여
춤을 추듯이 창을 휘둘렀다.
이때부터 삼자가 각기 그림 같은 무예를 자랑하며 한덩어리로 어우러져 싸웠는데,
장장 1백여 합이 넘도록 승부가 나지 아니하였다.
해수가 탄 백마가 문득 말 꼬리를 보이며 달아나는 듯하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역공을 취하면 길지와 문진이 흩어지며 몸을 피하였고,
해수의 창 끝이 길지의 옆구리를 파고들면 문진의 창은 해수의 등을 노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세 사람의 귀신 같은 창술에 모두 넋을 잃었다.
세 마리의 말이 한데 어우러질 때는 손에 땀을 쥐며 가슴을 졸였고,
그러다가 말이 떨어지면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탄성을 연발하였다.
싸움을 시작했을 때는 해가 아직 중천에 있었는데 어느덧 날이 저물어 사방에는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지칠 줄 모르고 창을 휘두르니
애꿎은 말들만 맥이 빠져 움직임이 부쩍 둔해졌다.
이들의 현란하고 화려한 무예를 시종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장왕이
마침내 싸움을 중지하는 징을 치도록 명하였다.
징이 울리자 삼자가 지친 말을 이끌고 용좌 가까이에 이르렀다.
왕이 흡족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명불허전이로다, 과연 해수의 무예가 볼수록 놀랍다.
개보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 나라 제일의 장수를 잃을 뻔하였구나.
해수는 이리 가까이 와서 명장을 알아보지 못한 짐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과주를 받으라.”
왕이 친히 금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해수에게 내리자
해수가 양손으로 잔을 공손히 받고서,
“황공하여이다.”
하며 단숨에 벌컥벌컥 잔을 들이켰다.
왕이 잠자코 술잔 비기를 기다렸다가 사뭇 안색을 고치어 준절히 타이르기를,
“그러나 재주는 재주고 죄는 죄다.
재주는 하늘이 준 것이며 죄는 사람이 짓는 것이다.
재주가 뛰어나다고 그것으로 죄를 덮을 수는 없는 것이며
오히려 재주가 뛰어난 자일수록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일에 더욱 유념하여
허물이 재주를 가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법도가 무너지면 재주 있는 자가 망하기란 질그릇이 깨어지기보다 쉽고
군주가 이 법도를 망각하면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다.”
하고서,
“해수는 들으라. 너는 방금 네가 타고 싸운 말의 목을 쳐서
너와 네 형의 지난 허물을 대신 속죄하라.
그런 연후에 너의 재주를 다시 논하리라.”
하였다.
해수가 두려운 마음으로 왕에게 국궁하고 돌아서니
자신을 잔등에 태우고 반나절이나 왕정의 공지를 누볐던 백마가
그새 주인과 정이 들었는지 입과 코로 더운 김을 씩씩거리며 대가리를 들이밀고 교태를 부렸다.
해수가 애잔한 마음으로 목덜미에 난 갈기를 쓰다듬자
백마가 더욱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
해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나는 영명하신 주군을 만나 죽은 목숨을 새로 얻었으나 너는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산 목숨을 졸연히 잃으니 이 딱한 노릇을 어찌할꼬.
부디 내세에는 나 같은 주인을 만나지 말라.”
말을 마치자 칼을 집어들고 번개같이 말의 목을 후려치니
창졸간 목을 잃은 말이 피를 한 장이나 솟구치며
네댓 걸음을 뚜걱뚜걱 걸어갔다가 마침내 힘을 잃고 슬며시 몸을 눕혔다.
왕이 해수를 향해 이르기를,
“그대는 오늘 이 일을 죽는 날까지 가슴에 담아두라.”
하자 해수가 돈수재배하며,
“어찌 잊으오리까.”
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가 짐짓 목소리를 밝게 하여,
“이제 죄 지은 해수는 죽고 재주 많은 해수만 남았구나.”
하고서,
“금일부로 해수를 병관좌평에 임명하고 그 동복형 해속과 나머지
우노, 순차 등도 방면하여 보내라.
또한 공성신퇴(功成身退)하는 노신들에게는 각기 그 재직 연차에 따라
식읍을 나눠주어 여생을 걱정 없이 보내도록 조치하라.”
하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던 해수는 너무도 감읍한 나머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신이 비록 견양지질(犬羊之質)이나 국법을 바로잡고 마마의 왕업을
돈독히 하는 일에 신명을 바쳐 일하겠나이다.”
하고 장공속죄를 맹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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