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7
해수에 대한 처리를 마치자 왕은 길지와 문진에게도 각각 장덕과 시덕 벼슬을 내리고
도성에 살도록 집 한 채를 하사하면서 특히 승려 문진에게 묻기를,
“어떤가? 부처의 제자를 그만두고 짐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니 문진은 입이 함박만하게 벙그러져서,
“신의 뜻이 본래 나라의 장수가 되는 것이었지 부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부처의 제자는 혜현과 같은 법기가 하는 것이옵고 신도 법기는 법기이오나
신의 법기는 나라의 장수가 되는 법기이올시다.”
하며 흰소리를 하였다.
그런데 먼저 내솔에 불과하던 서랑 개보에게 내신좌평을 제수한 것과 이때 덕솔 해수에게
병관좌평을 제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길지와 문진을 하루아침에 장덕과 시덕에 중용한
장왕의 처사는 그 자신 마동 왕자에서 별안간 국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전조에는
유사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파격이었다.
이와 같은 공전절후의 조치는 장왕으로서는 다분히 계산된 것이었으며
그 여파는 곧 노회한 중신들의 퇴진으로 연결되었다.
백제 조정의 늙은 대신들은 젊은 군주의 관행을 무시한 잇단 행적에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벼슬에 연연해하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하게 될는지 알 수 없었다.
더욱이 좌평 세 사람의 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칠 수도 있는 왕이었다.
그렇게 개죽음을 당하느니,
또는 치욕을 무릅쓰고 새파란 좌평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물러나서 노후를 편안히 지내는 편이 한결 낫다고들 생각했다.
병관좌평을 해수에게 물려준 채 조정좌평에 있던 태기가 제일 먼저 왕에게 물러날 것을
자청하여 말하니
이를 기화로 대부분의 늙은 대신들이 줄줄이 태기의 뒤를 따랐는데,
그 숫자가 6품인 내솔 이상에서만도 물경 1백여 명에 이르고,
달솔 30인 중에서도 물러난 이가 해미갈을 위시해 반수를 상회하였다.
왕은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노신들에게 일일이 녹봉과 식읍을 하사하고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한편 젊고 새로운 신진들을 뽑아 빈자리를 채웠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전날 장수를 선발하는 시험에서 연문진과 마지막까지 겨루었다가
그 조상이 동성대왕을 시해하고 가림성에서 모반한 백가였음이 밝혀져
도리어 곤장을 맞고 물러났던 백기의 일이었다.
왕은 각지에 방을 써붙여 낙향해 지내던 백기를 도성으로 불러들이고
그에게 문진과 같은 시덕에 제수하여 사군부의 장수로 삼으면서,
“백기는 더 이상 전조의 일을 염두에 두지 말라. 짐은 오로지 너 하나를 볼 따름이니라.”
하고 위로하니 한동안 낙담하여 술로 세월을 탕진하던 백기가 너무도 황감하여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이몸이 부서져 가루가 될 때까지 오직 전하께만 충절을 다하겠습니다.”
하였고 집에 돌아와서는 스스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였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로 빈자리가 충원되자
왕은 외관의 9부와 장리들을 모조리 교체하여 저마다 연고가 없는 곳으로 보내고
5방의 방진과 방좌, 10군의 장수들까지도 빠짐없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또한 한때 신세를 입었던 문진의 형 매우도 잊지 않고 불러서 후히 대접하였고,
작은외숙인 정가는 수시로 궁에 청하여 살뜰한 정을 나누었으나,
오직 대가만은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많은 탓에 한 번도 부르지 않았을 뿐더러
안부조차 묻는 일이 없었다.
신유년과 임술년을 거치며 백제 장왕은 군율을 새로 세우고 친히 동북방의 군영으로
행차하여 성곽을 둘러보며 열병을 하였다.
그는 혈기방장하고 패기만만한 젊은 군주였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며,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일처럼
사람이 힘과 꾀를 써서 이루지 못할 일도 없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는 보위에 오른 날부터 선대의 원한을 갚고 백제의 옛 영화를 되찾겠노라
줄곧 공언해왔고, 항차 이를 명분으로 조정의 노신들을 일거에 몰아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의 뜻을 한시 바삐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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