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4
왕이 해수의 무예를 시험하기 위하여 불러들인 자는 용화산 사자사의 승려 연문진과
화적촌의 두령 길지였다.
승려 문진은 전날 장왕이 화적촌에 기거할 때 오며가며 만나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문진이 비록 장왕의 인품이며 기개는 높이 평가하여 연상으로 깍듯이 대하였으나
오직 왕가의 후손이라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뢰할 수가 없어 겉으로만
이를 믿는 체하였는데, 하루아침에 태자가 되고 또 임금이 되자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반가우면서도 일변으론 전에 혹 무례하게 대접하고
함부로 처신한 일이 없는지를 걱정하였다.
이것을 사자사에 같이 머물던 지명의 상좌 혜현에게 말하자
속세의 일에 무심하던 학승 혜현은,
“자네가 바로 미친 중놈일세.”
하며 대뜸 욕부터 하여 하는 수 없이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화적촌의 길지를 찾아가
흉금을 터놓곤 하였다.
길지가 문진과는 용화산에 터를 잡은 직후 노상시비를 벌이다 알게 된 사이로,
문진이 화적질 나갔던 장정 대여섯을 한꺼번에 메다꽂고 나머지는 양손에
두어 놈씩 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질질 끌듯이 하여 화적촌을 찾아오니
길지가 문진의 비범함을 단숨에 알아보고 안으로 청하여 좋은 말로 구슬렀다.
문진이 시초에는 길지를 개 꾸짖듯이 꾸짖으며 화적패의 수괴라고 상대하지 않다가
길지로부터 화적질에 나선 내력을 듣고야 차차 마음이 움직여
저 또한 장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중질로 나서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양자가 밤새 말술을 마시며 서로 분개하고 동정하다가 길지가 먼저 의형제를 맺자고 제안하니
문진이 껄껄 웃으며,
“부처의 제자가 화적패의 아우라니 세상에 그런 말법이 어디 있습디까?”
대꾸는 비틈하게 하고서도 간간이 형이라 칭하였다.
길지가 무오년 초겨울에 태기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장과 함께 궐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초봄,
장이 과연 왕가의 자손임이 밝혀져서 왕명으로 방면되자
주민들을 이끌고 용화산으로 와서 살았는데, 수년간 한솥밥을 지어 먹고 살던 사람이
태자가 되었다가 곧 보위에 오르니 마치 제가 왕이 된 듯이나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장왕의 즉위식이 있던 날에는 촌민들을 이끌고 나라잔치가 벌어진
도성의 대궐 주변으로 몰려가서 덩실덩실 춤까지 추며 기뻐 날뛰었다.
이때 단고를 비롯한 화적촌 식구들이,
“오늘같이 경사스러운 날 우리가 예까지 와서 대왕 전하를 배알하지 아니하고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왕폐하가 아니오?
대왕께서도 우리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필경 크게 기뻐하실 게요.”
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은근히 왕을 만나보고 싶던 길지도,
“그래 볼까.”
하며 궐문을 지키던 군졸에게로 가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임금을 봉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군졸이 보니 난데없는 자들이 나타나서 왕의 친견을 요구할 뿐 아니라
길지의 생긴 모습이 워낙이 험상궂고 우락부락한지라,
“예끼, 여보쇼! 임금이 무슨 촌구석의 장리쯤이나 되는 줄 아오?
나는 궐문 지킨 지가 10년이 넘었어도 아직 제대로 본 임금님이 없소.
공연히 실없는 소릴랑 마시오.”
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래도 일행이 물러나지 아니하고,
“낸들 그런 사정을 모를 리가 있겠소?”
“아는 사람이 어째서 그러오?
오늘같이 좋은 날 하릴없이 전내의 호위병들에게 걸려 변고나 당하지 말고 싸게들 물러가오.”
“허락이 나든 안 나든 안으로 연통이나 좀 해주시오.
용화산서 길지가 왔다면 틀림없이 왕명이 내릴 것이외다.”
한사코 고집을 피워대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우리가 모다 지금 임금이 되신 장왕 전하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식구처럼 지내던 사람들이오. 우리야 물러갔다가 어차피 훗날 임금의 부르심을 받으면 다시 올 사람들이니
그때 배알하면 그만이지만 만일 임자가 연통도 아니하고 임금님의 반가운 손을
그대로 물리쳤다가 나중에 꾸지람을 듣고 벌을 받기라도 한다면 그 얼마나 딱한 노릇이겠소?
우리는 다른 것보다도 그것이 걱정이오.”
하도 자신만만하게 지껄이니 군졸이 내심 께름칙한 마음도 없지 아니하여,
“용화산에 길지라 하였소?”
하고는 이를 궐내에 연통하였다.
전내부 내관이 이 소식을 듣고,
“무엇하는 자들이라 하더냐?”
“전날 전하와 한식구처럼 지내던 자들이라 합디다.”
“벼슬이 있는 자들이더냐?”
“웬걸입쇼. 다들 평민 복장을 하였는데 행색이며 생긴 것들이 그리 개자하지는 아니합디다.”
“용무는 무엇이고?”
“그런 것도 말하지 아니하고 무턱대고 전하를 배알하게 해달라 하더이다.”
몇 마디를 꼬치꼬치 물어 답을 들은 뒤에,
“오늘은 나라에 경사스러운 날로 행사가 번다하고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냥 물러갔다가 훗날 조용한 때를 택하여 다시 오라고 해라.”
임의로 처결하니 군졸이 다시 궐문으로 나와서 내관의 말을 전하고
쓸데없이 다리품만 팔았다고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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