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8
임술년 초가을에 왕은 조정의 중신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그간에 우리 백제가 적의 침공을 받고 고전한 것은 늘 외침이 있고서야
군사를 내고 오로지 이를 막는 데만 급급했기 때문이오.
어차피 적이 있는 한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싸움이 일게 마련인데
번번이 침략을 당하고서야 싸움에 응할 까닭이 무엇이오?
지금 고구려의 아이들과 신라의 개까지도 우리 백제를 시쁘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소.
병법에도 이르기를 최선의 방비는 적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라 하였거니와,
수세를 공세로 바꾸지 않는 한 요순지절은 영구히 오지 않을 것이오.”
하고서,
“과인이 보위에 오르고 지난 이태 동안 조정에는 젊고 영특한 인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국법의 어지러움은 모두 없어졌으며, 군기가 바로 서고 군율이 정비되어
장수와 병졸의 사기가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니 어찌 성왕 전하의 묵은 원한을 갚지 않으리요.”
하고 비로소 신라를 칠 뜻을 밝혔다.
병관좌평 해수를 비롯한 젊은 중신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실로 훌륭하신 결단이십니다.”
“이는 신 등이 오래전부터 바라고 별러왔던 일이올습니다.”
하므로 왕이 크게 흡족해하였는데,
홀연 한 신하가 앞으로 나서며,
“전하, 아직은 시기가 상조하여 군사를 움직일 때가 아니올시다.
부디 통촉하시어 몇 해 후로 명을 미루소서!”
하고 큰 소리로 고하였다.
왕과 신하들이 모두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전조의 대신 왕변나였다.
위덕왕의 신임을 톡톡히 받아 무오년에는 향도를 자청하는 왕의 서신을 가지고
수나라를 다녀오기도 했던 왕변나가 이때 쉰을 넘긴 나이로 은솔 벼슬을 지내며
외경부의 일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노신 소리를 듣기 이른 나이였으나 새파란 청년들이 좌평을 지내는 마당이라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대신들의 좌장(坐杖) 노릇을 하고 있었다.
“때가 아니라니? 어찌하여 때가 아니란 말이오?”
왕이 짐짓 불쾌한 표정으로 왕변나를 쳐다보자 왕변나가 이내 부복하여 고하였다.
“지금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의 정세는 마치 솥발의 형세와 같아서
그 정립(鼎立)하여 지내는 세력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때에 우리가 군사를 내어 신라를 친다면
신라가 거세게 항전할 것은 물론이요,
고구려 역시 그 틈을 노리고 우리와 신라 중에 약한 곳을 치려고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입니다.
자칫 일이 그릇되면 양국의 협공을 받을 공산도 없지 않습니다.
지금은 삼국의 국력이 제각각 비등하여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형국이온대,
이와 같은 때에 굳이 앞장을 서서 화를 자초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하면 우리는 언제 군사를 움직여 전조의 원한을 풀 수가 있단 말이오?
경의 말대로라면 신라와 고구려는 영원히 치지 못할 것이 아니오?”
왕이 따지듯이 묻자 왕변나는 망설이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런 뜻은 아니옵니다.
일전에 신이 위덕대왕의 명을 받잡고 수나라에 갔을 때 수나라 왕실에서
심한 논란이 있었사온즉,
그때는 워낙이 사람과 물자의 피해가 극심하여 어쩔 수 없이
고구려와 화친하기로 방침을 정하였으나 신이 보기에 그것이 영구한 일은 결코 아니요,
조만간 수나라가 고구려를 다시 칠 것은 거의 명백한 일이올습니다.
특히 그때 수나라 왕자 양광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침식을 거르면서까지
기필코 요동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누차 신에게 밝힌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삼국이 비록 수나라에 나란히 조공하고 똑같이 수나라 조정을 섬길지언정
수나라에서 가장 가깝게 여기는 나라는 누가 뭐래도 우리 백제이옵니다.
위덕대왕께서 수나라의 문제와 맺어놓은 우애와 친분은 가히 피를 나눈 형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안으로 국력을 비축하시고 수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두 왕실의 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그러면 멀잖은 날에 기회는 저절로 찾아올 것이며,
수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치고 아울러 신라를 토평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부디 칼날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소서.”
노신 왕변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왕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경의 말은 감이 익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자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우리가 신라를 친다고 해도 고구려가 지경을 접한 신라를 쳤으면 쳤지
수군을 내어 우리를 공격하려고는 들지 않을 것이므로 경의 걱정하는 바는
오로지 노신의 부질없는 노파심일 뿐이다.”
그리고 왕은 돌연 옥음을 높여,
“동편의 한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신라가 오늘날과 같은 힘을 얻게 된 근거는
전날 고구려의 땅이었던 국원을 공취하고 당성군을 손에 넣어 황해 뱃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근은 본래 위례성과 미추홀이 있던 곳으로 비류와 온조 두 분 시조대왕께서
처음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백제의 성역이다.
내 어찌 이곳을 되찾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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