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5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길지와 문진이 왕명을 받고 사신을 따라 입궐했다.
왕이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린 채 해 밝은 남쪽 정자에 자리를 높이고 만승의 위엄을 갖추어
앉았는데, 위에는 넓은 도포에 자줏빛 소매의 자대수포(紫大袖袍)를 걸치고,
밑으로는 푸른 비단으로 만든 청금(靑錦) 바지에 검은 가죽신을 신고,
머리에는 금꽃을 구부려서 꽂은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허리에는 흰 가죽으로 만든
소피대(素皮帶)를 찬 모습이 전에 알던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아니하였다.
양자가 두 손을 앞에 나란히 모으고 중신들이 늘어선 사이로 조심스레 걸어가서
왕에게 절한 뒤에 그대로 부복하니 문득 머리 위에서 우렁찬 옥음이 들리기를,
“길지와 문진은 고개를 들라.”
하였다.
양자가 간신히 고개를 들고 용좌를 바라보니 왕이 용안 가득히 웃음을 짓고서,
“화적촌 장리께서는 그간에 무양하셨는가?”
먼저 길지를 향하여 안부를 물었다.
길지가 그제야 긴장을 풀고,
“조석으로 보던 식구가 줄어 허수한 마음 한량이 없었나이다.”
하고서,
“전날 전하께서는 소인을 향하여 매양 대적이라 하시더니
오늘 새살림 차린 곳에 와서 보니 대적은 소인이 아니라 바로 전하이올습니다요.”
하고 전날 하던 대로 농지거리를 하였다.
그러자 시립하고 섰던 중신들이 목자를 부라리며 방자하다는 둥 여기가 시정잡배들이
우글거리는 저자인 줄 아느냐는 둥 꾸중과 호통이 장히 심하였다.
왕이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팔을 흔들어,
“그만들 두라. 길지는 짐에게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하며 중신들의 소란을 막고 나더니,
“대적놈의 입에서 대적 소리를 들으니 가히 영예로다.”
하고 목청을 높여 껄껄거렸다.
그리고는 승복을 입은 문진을 향해서도 근황을 묻고
사자사의 도승 지명과 혜현의 안부까지 두루 확인하고 나서
문득 자세를 고쳐 이르기를,
“너희 두 사람은 모두 재주와 기량은 출중하나 그간 나랏일이 고르지 못하여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다.
세상에 이처럼 딱한 자들이 어디 너희 둘뿐이겠느냐?
과인이 옛날부터 이 점을 알고 내심 퍽이나 안타깝게 여겼으나 그간에는
이를 도울 방법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지냈거니와,
이제 세상이 바뀌어 과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어긋난 것을 바로잡고
나라의 그릇된 관습과 국법까지도 고칠 수가 있게 되었으니
너희도 원치 아니하던 삶을 버리고 시초에 가졌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라.
내 너희 둘에게 기회를 줄 것이로되 만일 결과가 흡족하면 전국에 방을 내려
너희와 같이 초야에 묻힌 인재들을 샅샅이 가려내고 무겁게 쓸 것이다.”
하고는 좌우에 명하여 말과 창을 준비하라 일렀다.
잠시 뒤 궐옥에 갇혔던 해수가 병사들에게 이끌려 장왕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왕은 해수의 몸에 묶인 오라를 풀어주도록 하고 친히 술 한 잔을 하사한 뒤에,
“네가 가진 재주를 아낌없이 보여다오.”
하며 먼저 말과 창을 고르라 하니 해수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흰말 한 마리를 골라 잔등에 훌쩍 뛰어올랐다.
왕이 길지와 문진에게도 술을 권하고서,
“해수는 비록 죄인이나 만사람이 인정하는 백제의 최고 장수다.
또한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늙은 형과 중신 두 사람의 목숨이
해수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은 필지의 일이다.
너희 둘이서 힘을 합쳐 대적해보겠느냐?”
하고 물었다.
길지가 먼저 대답하기를,
“둘이서 하나와 겨루어 싸우는 것은 지면 망신이요
이겨도 빛날 것이 없는 밑지는 장삽니다.
또한 저 장수에게 인명이 달렸다면 소인에게는 일생이 걸린 일이니
죽음을 각오하기는 매한가지올시다.
제가 먼저 나가서 우열을 가린 연후에 만일 미치지 못하면 문진을 내십시오.”
하니 문진이 지지 아니하고,
“둘이서 하나와 겨루면 재미가 없는 것은 소승의 생각도 마찬가지이나
젊은 사람이 먼저 나가 싸우는 것은 전장의 상규요 군문의 불문율입니다.”
하고서 길지를 돌아보며,
“마땅히 소승이 선을 맡아야 순서가 제대로 되는 것이오.”
말을 마치자 허락도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말이 묶인 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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