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장왕(璋王) 1
경사의 조롱거리로 어려서부터 마동 왕자라 놀림을 당하던 부여장이 드디어 보위에 올라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불과 이삼 년 전 위덕왕이 보위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그 자신조차 짐작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장왕은 앞선 몇몇 왕들과는 달리 기개와 지략이 출중하고 호걸다운 기백을 갖춘 야심만만한
젊은 군주였다.
국상을 치르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조정의 중신들을 편전에 불러모으고,
“짐은 오랫동안 저자의 속인으로 지내면서 나라의 국력이 날로 쇠퇴하여 전날
동성대왕과 무령대왕의 시절에 이르지 못함을 크게 개탄해왔다.
매사에는 모다 연유와 사단이 있는 법이다.
나라의 국력이 쇠하는 것도 마땅히 그 까닭이 있을 것인즉 나랏일을 돌보는 경들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하며 일일이 중신들을 면대하여 물으니 수럭수럭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홀연히 말석의 한 선비가 나서서 진언하기를,
“감히 아룁니다. 백제의 국력이 전날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은
그간 국사가 백성들의 뜻에 부합하지 아니한 것과 중신들의 권세가 지나친 것과
또한 나라에서 새로운 신하를 뽑는 데 등한히 한 점이 원인이었나이다.”
하고 낭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장왕이 말하는 선비를 굽어보니 키는 작고 몸집은 뚱뚱하여 외양은 별반 볼품이 없으나
눈빛은 더할 나위없이 맑고 초롱초롱 빛났다.
장왕이 흡족한 낯으로,
“그대의 말이 옳다.”
하고 이름을 물은즉, 내솔 벼슬에 서랑(書郞)으로 있는 개보(愷普)라 하였다.
왕이 개보에게 다시 묻기를,
“하면 이제 어떤 일부터 할 수가 있겠는가?”
하자 개보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기를,
“지금 나라에는 좌평이 대여섯 사람이요,
달솔이 서른이며, 그 아래로 도합 열여섯 관직에 복무하는 벼슬아치들이
허다히 있을 뿐만 아니라 내외관을 통틀어 스무 개 부처에 수백 명의 관리들과
수천 명의 장수들이 있사옵니다.
이들이 비록 정해진 임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대개는 3년이 지나도
옮겨가는 이가 드물고 다시 그 자리에 그대로 복무하게 되니
한번 벼슬을 얻어 외관의 장리로 나간 자는 그곳에서 일생을 보낼 방편과 부를 축적하려고만
꾀할 뿐 백성들의 억울한 점을 살피고 가리지 않습니다.
이는 외관과 내관이 한가지로, 외관의 장리는 내관의 좌평이나 방진에게 잘보이면
그것으로 벼슬이 유지되고, 내관의 좌평이나 방진은 10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으니
임금이 제아무리 정사를 올바로 펴려고 해도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뜻이 제대로 흐르지 아니할 뿐더러 이로 하여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지난 일을 상고하여 보건대 나라의 힘이 강성했을 적에는 내관과 외관을 막론하고 3년 임기가
철저히 지켜져서 관리가 한곳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옮길 적에는 전직에서 세운 공덕을 논하여 벼슬과 관작을 높이고 내렸사온데,
지난 오륙십 해 동안에는 이 법도가 무너져 드디어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황한 어조로 국법의 어지러움을 꼬집고 나서,
“이제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이것만 제대로 잡아주시면 나머지는
저절로 고쳐질 수가 있겠나이다.”
하고 진언하였다.
“짐에게는 그대와 같이 영특하고 총명한 젊은 신하가 필요하다.”
왕이 개보를 칭찬하여 말하자
좌중이 술렁거리며 나머지 중신들의 안색이 대부분 험악해졌다.
늙은 중신들을 대표하여 병관좌평 태기가 마뜩찮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작금의 국력이 전대 동성대왕과 무령대왕의 시절에 미치지 못한다 하심은
신 등도 그리 알고 있는 터라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오나 국력이 쇠하는 것과 성하는 것은 일국의 역사에 매양 있는 일이옵고,
특히 그 사유를 찾자면 나라 밖의 어지러움과 혼란에서 구하여야지
나라 안의 일 때문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또한 걸핏하면 한재와 기근이 들어 나라의 농사를 망친 것도 민심이 고르지 아니한 까닭이온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런 것들까지도 모다 왕실과 중신들의 탓으로 돌리니
어찌 이를 온당하다 하오리까? 방금 개보의 말은 국사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더벅머리 선비의 소견으로서 모든 책임을 중신들에게만 떠넘기려는 비열한 수작이올시다.
한낱 일개 서랑에 불과한 자와 어찌 국사의 오묘함을 논할 수 있겠나이까.
전하께서는 얄팍한 개보의 언동에 속지 마시고 부디 혜안으로 국사의 근본을 살펴주소서.”
태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달솔 해미갈이 입을 열었다.
“산이나 바다도 그 바라보는 거리며 각에 따라 풍광이 다른 것은 세상의 이치올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관직을 옮겨다니는 일도 너무 시기가 짧고 빈번하면 맡은바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운 법이올시다.
재작년에 붕어하신 위덕대왕께서는 내관과 외관의 이동이 너무 번잡하여
도리어 나라에 해가 된다시며 특별히 문책할 관리가 아니면 유임을 시키셨거니와,
신이 보기에도 이를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성급히 국사의 관행을 바꾸지 마옵소서.”
중신들의 반발이 만만찮은 것을 안 장왕은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노기 띤 음성으로 말하였다.
“한심하도다! 경들은 대체 일이 어디까지 가야 정신들을 차린단 말이냐?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과인이 왕실에 들어온 후로 밤마다 누구를 만나는지
경들은 짐작이나 하느냐?
해가 지고 밤이 깊으면 궐내를 맨발로 저벅저벅 걸어다니는 목 없는 시신의 주인을
본 적이 있느냐?
수십 년 세월 동안 맺힌 원한을 풀지 못하여 구만리 중천을 중음신으로 떠도는
나의 증조부 성왕 폐하의 구슬픈 울음 소리를 경들은 진정코 듣지 못한단 말인가?”
왕이 별안간 신라군의 칼에 처참하게 전사한 성왕의 일을 거론하자
중신들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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