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마동 부여장 21
한편 장의 소문을 들은 부여선은 부왕에게 가서 대가한테 들은 일들을 낱낱이 아뢰고
선쳐해줄 것을 말했다.
왕이 즉시 조정좌평에게 명하여 궐옥에 갇힌 장을 어전으로 데려오라 하였다.
장이 왕과 태자의 앞으로 불려와 읍하고 고개를 들자 조부인 왕은 장의 용모와 기상에 탄복하여
입이 있는 대로 벌어졌고 태자 선은 죽은 안향의 현신을 보는 듯해 시종 눈물이 글썽하였다.
“이리 가까이로 오라.”
왕이 온화한 낯으로 장을 불러 장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오자,
“어디 보자꾸나.”
하고서 손자의 손이며 볼을 어루만지다가,
“영락없는 내 핏줄이요, 좀처럼 보기 드문 봉모인각일세. 허허, 아니 그런가 태자?”
하며 선을 돌아보았다.
선이 감정에 북받쳐 시초에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한참 만에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장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돌아가신 어머니한테서 말씀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이처럼 한꺼번에 뵙게 되니
소자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그래 그간에 얼마나 고초가 심하였느냐?”
선이 안쓰러운 낯으로 묻고,
“너의 어미한테서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면 어찌하여 할아버지를 찾아뵙고
도움을 청하지 않았더란 말이냐?
할아버지께서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계시지 않았느냐?”
하자 장이 대답하기를,
“아버지께서 이미 계시지 않은 마당에 할아버지를 찾아뵈오면 소손이 할아버지의
손자임을 증명할 길이 막연할 뿐더러 나라와 왕실에도 평지풍파를 일으킬 것이 뻔하여
오직 아버지께서 임기를 마치시고 귀국하시기만을 학수고대하였나이다.
이는 또한 돌아가신 어머니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오나 다만 마음이 스산하고 몸이 고달플 적에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혼자 위안을 삼은 일은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하니 선은 마음이 아파서 말을 못하는데 할아버지인 왕은 다시금 장의 볼을 어루만지며,
“과연 기특하도다! 말하고 생각하는 데 한 치의 빈틈도 없구나!”
하며 흡족해하였다.
이미 노쇠한 왕이 아들과 손자를 거느리고 한참을 담소하고 앉았다가 피곤하여 하품을 하였다.
“소자, 저 아이를 데리고 물러가겠습니다.”
선의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 부자가 모처럼 만났으니 밤새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하고서,
“가서 그동안 나누지 못한 부자의 정을 마음껏 나누도록 하라.”
하여 장이 어전을 물러나서 태자가 거처하는 곳으로 왔다.
이때부터 두 부자가 불을 밝히고 소롯이 건밤을 새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튿날 해가 뜰 때까지 말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날이 밝자 선은 아들을 앞세우고 안향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선이 망자의 혼백을 향하여 말하기를,
“임자한테 하지 못했던 지아비 노릇을 이제 임자가 남긴 아들에게 아비 노릇으로 대신하겠네.
그래야 이 다음에 죽어서라도 임자를 볼 낯이 있지 않겠나?”
하였는데, 대궐로 돌아온 즉시 왕명을 얻어 궐옥에 갇힌 화적촌 주민들을
모두 방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과 선화에게는 경사에 큰 집을 얻어 살도록 하고 의식을 돌보아주었을 뿐 아니라
수시로 장을 궐로 불러들이거나 스스로 장의 집을 찾아와 부자의 정을 살뜰히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에 계왕이 급격히 기력을 잃고 시름시름 지내다가 곧 천수를 다하여 붕어하니
태자 선이 장사를 치르고 보위에 올라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왕은 즉위하자마자 장과 선화를 궐내로 불러들이고 중신들에게 장을 태자로 삼을 뜻을 밝혔다. 이에 태자 시절부터 왕의 마음을 알고 있던 백제의 중신들이 반대는커녕 모두 현명한 처사라고
입을 모으고, 전날 첩자 운운하던 것의 빌미가 되었던 선화의 일과 또한 신라왕에게
서신을 받은 일까지도 갑자기 장의 자질과 인품을 높이는 덕목으로 바뀌어서,
“이는 장왕자께서 그만큼 인품이 후덕하고 기개가 출중하신 증거이오니
마땅히 태자로 삼으셔야 옳습니다.
세상의 인심이 나라와 국경을 초월하여 오직 장왕자께 있나이다.”
“신라왕이 서신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던 예는 전고에 없던 일로, 항차 왕자께서
왕실에 계시지 아니하고 속인으로 지내시며 신라왕의 서신을 받았으니
자랑거리면 자랑거리였지 허물이 될 턱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두고 왕자의 허물이라 말하는 일부 생각 없는 무리의 말을 듣지 마소서.”
하고 다투어 간하게 되었다.
심지어 용화산으로 장을 잡으러 갔던 병관좌평 태기와 달솔 해미갈까지도 이 무리에 동참하니
시류와 권세를 따라 움직이는 세간의 인심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왕은 왕비의 반대와 원망을 무릅쓰고 중신들의 뜻을 모아 장을 옹립하게 한 뒤
이를 가납하여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절을 짓고 불사를 일으켜 왕업의 번성과 죽은 안향의 명복을 빌었다.
그런데 겨울에 접어들며부터 왕은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자리에 눕는 날이 많았다.
두꺼운 이불을 몇 채나 덮어쓰고도 이를 덜덜 맞부닥뜨리고 밤낮으로 상토하사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경사의 이름난 명의들이 줄줄이 내전으로 들어와 맥을 짚고 처방을 내렸는데,
왕이 괴질을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약을 쓰자 조금 차도가 있었고, 그러자 봄에 오랫동안 한재가 드니 왕이 농사를 걱정하고
신하들의 걱정과 만류를 뿌리친 채 친히 칠악사로 행차해 기우제를 지냈다.
단을 쌓고 천신을 향해 기우제를 지내자
별안간 맑은 하늘에서 감응이 일어 먹구름이 몰려들었고,
이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왕에게는 치명적인 일이 되고 말았다.
비에 홀딱 젖어 환궁한 왕은 그날부터 그만 괴질이 덧나서 식음을 폐하고
심하게 앓았는데, 5월이 되자 끝내 회도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태자 부여장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부왕의 때 이른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는 국상을 치르는 내내 부왕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울다가 실신까지 하였고,
장지에 이르러서는 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매장을 하러 따라왔던 역부들이
한동안 애를 먹기도 하였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장 장왕(璋王) 2 회 (0) | 2014.07.19 |
---|---|
제9장 장왕(璋王) 1 회 (0) | 2014.07.19 |
제8장 마동 부여장 20 회 (0) | 2014.07.19 |
제8장 마동 부여장 19 회 (0) | 2014.07.19 |
제8장 마동 부여장 18 회 (0) | 2014.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