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유신을 얻다 5
이때 대왕의 의중은 당연히 남승보다는 이리벌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다만 백반을 위시하여 조정의 절반에 가까운 중신들이 남승을 지지하므로
얼마간 결정을 유보하여 보기 좋은 모양새를 갖추려 했을 따름이었다.
용춘 또한 대왕의 이와 같은 의중을 이심전심으로 깨달아 더 이상 부언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물러났는데, 예기치 않은 일은 바로 그날 밤에 왕실에서 일어났다.
대왕이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막 저녁 수라상을 물리고 났을 때
돌연 왕후가 울상을 지으며,
“전하께서는 용춘으로 사위를 삼은 뒤에 아무래도 나랏일을 잘못 처결하시는 듯합니다.”
하고서,
“저녁나절에 어마마마께서 저를 부르시고 용춘이 들어 나랏일을 망친다며
어찌나 노발대발하시는지 감히 뵈옵기 민망하여 혼이 났습니다.”
하였다.
대왕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하여 사유를 물었더니
왕후가 만호 태후의 전언이라면서,
“제왕의 자리는 무릇 불편부당함을 신조로 하여 어느 쪽으로도 기울거나
치우치는 법이 없어야 하거늘 대왕께서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용춘의 말만을 신봉하고, 용춘이 천거하는 사람들만 쓰며, 용춘의 뜻대로 정사를 펴나가니
일부 중신들 사이에선 대왕은 다만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용춘이 왕이라는 말까지 떠돈다고 합니다. 용춘을 일컬어 소왕이라고 칭하는 사람마저 생겨났다고 하니
이 어찌 걱정스러운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이 시초에는 왕후가 전하는 만호 태후의 말을 듣고,
“공연한 소리요.”
하며 무시하려 했으나,
“공연한 소리가 아니올시다.
저 또한 눈과 귀가 있고 엊그제는 저의 남동생인 등품이 궁에 다니러 왔다가
똑같은 소리를 하더이다.
사량부 용춘의 집에는 날마다 찾아오는 빈객들로 앉을 자리가 없고,
그곳의 세와 위엄이 대궐을 능가한다고 합디다.
이 사람들이 용춘의 집에 와서 더러는 청탁도 하고 더러는 왕실의 욕도 늘어놓는데,
청탁을 하면서 받은 재화가 곳간에 그득한 것이야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일은 그곳에 출입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용춘을 일컬어
왕의 재목이라 떠받들고 개중에는 적당한 때가 오면 용춘을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자들마저 있다고 합디다.
이런 주장이 특히 전대 공신의 자손들을 중심으로 만연되고 있다 하니
결코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말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대왕도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면 용춘이 지금 역모를 꾸미고 있단 말이오?”
문득 옥음을 높여 물으니 왕후가 대답하기를,
“아직 구체적인 물증은 없으나 그런 조짐은 농후한가 봅디다.
태후마마께서도 이를 걱정하시며 용춘의 집에 자주 출입하던 자가 내일 입궐하여
그간에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고변할 터인즉,
이 자의 입을 통해 만사가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 하더이다.”
하였다.
대왕이 용춘을 떠올리고 설마 그런 일이 있으랴 고개를 젓다가도
일변으론 께름칙하고 두려운 느낌을 떨칠 길이 없었다.
이튿날 사량부 용춘의 집에 자주 출입했다는 중석(中晳)이란 자가 나타났다.
중석이 만호 태후의 부름을 받고 백반을 따라 입궐하여 말하기를,
“소인은 진흥대왕 시절에 주령 장군을 따라 독산성에 갔다가 고구려군의 활에 맞아 전사한
길사 명덕의 손자로, 세간에서 선대의 공덕이 있는 자는 용춘 나리를 찾아가 아뢰면
반드시 벼슬길을 열어준다 하옵기에 가산을 헐어 쌀 석 섬을 지고 용춘 나리 댁을
물어서 찾아갔습니다.”
하고서,
“그 후로 용춘 나리 댁에 상시 출입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또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곳에 출입하는 자들이 여출일구로 말하기를 금왕 폐하께서는 전왕을 독살하고
왕위에 오른 분으로 시초부터 제왕의 자격이 없는 분이었다 하고, 보위가 제대로 흘렀으면
용춘 나리께서 임금이 되어 계실 것이며, 사람의 자질로 보더라도 금왕 폐하는
왕의 재목이 아니니 전왕을 폐한 일이 신라 역사 6백 년 가운데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하더이다.
그때 어떤 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이미 전왕을 폐하였는데 금왕을 폐하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느냐고 선동하니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옳은 소리라며
뇌동하였는데, 그 기세가 당장이라도 대궐로 쳐들어갈 듯하였나이다.
또한 금왕께서 붕어하시면 용춘 나리가 보위를 잇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이도 있었고,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허무하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옵고 참으로 아뢰기 송구하오나 왕실에 늙은 여우가 있고 궐 밖에는 젊은 도적이 있어
나라에 난신적자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도 있었사온데,
이는 곧 만호 태후와 진정왕을 지칭하는 소리가 명백하였나이다.
이 모든 일을 종합하여보자면 조만간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나리란 것은 소인 같은
무지렁이도 능히 그 짐작이 어렵잖았으니,
소인이 비록 벼슬길을 바라고 그곳에 간 자이나 어찌 두려운 느낌이 일지 않았겠나이까.
하여 벼슬길도 중하지만 우선 역모부터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렇듯 죽음을 무릅쓰고
대궐에 들어와 그동안 보고 들은 바를 가감 없이 아뢰는 것이니
부디 태후께서는 소인의 충절을 헤아려주사이다.”
하고 사뭇 비장한 어조로 진언하였다.
성정이 불같은 만호 태후가 중석의 고변을 듣는 동안에 몇 차례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였는데, 말이 끝났을 때는 도리어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져났다.
“너의 말이 모두 사실이렷다?”
중석을 향하여 오금을 박듯이 물으니 중석이 읍하며 가로되,
“어찌 이같이 엄청난 일을 거짓으로 아뢰겠나이까.”
하고서,
“만일 새털만한 거짓이 있더라도 소인은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겠나이다.”
하였다.
태후가 그 길로 당장 편전에 사람을 보내어 대왕을 들라 하니
이미 사정을 알고 있던 대왕이 급히 태후궁으로 건너왔다. 태후가 대왕에게,
“잘 오셨소. 자, 어디 이 자의 말하는 것을 직접 들어보구려.”
하고는 중석에게 말을 시키자 중석이 전에 아뢴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반복해 아뢰었다.
“대체 그와 같은 불충한 주장을 편 자들이 누구냐?”
대왕이 옥음을 높여 묻자 중석이 망설이지 않고 고하기를,
“황종장군(거칠부)의 아들인 장연과 덕활 장군의 손자 어생,
그리고 귀산과 한돈 같은 자들이 주로 말하였고,
동대의 아들 만세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승려와 또한 태종장군(이사부)의 아들이라는
사람도 두어 차례 본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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