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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유신을 얻다 4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55

제7장 유신을 얻다 4

한편, 천명 공주와 혼인하여 백정대왕의 사위가 된 용춘은 하루아침에 신라 왕실의

막강한 지위에 올라 대왕의 신임과 백관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는 존귀한 몸이 되었다.
 
벼슬도 당장 파진찬에서 이찬으로 뛰어올랐으며, 대왕이 거처하는 편전에 비표 없이

상시 출입이 가능하였고, 궁성 밖 사량부의 진지대왕이 붕어했던 집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빈객들로 십수 년 만에 문전이 다시금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이에 용춘의 어머니인 폐왕비 지도부인이 그간 적적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이제 모처럼 사람이 사는 집 같구나.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

자주 이런 말을 입에 올리곤 하였다.

지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용춘의 세도와 권한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해졌다.

중신들의 주장에 따라 귀양살이를 가고 말고 할 때의 용춘이 아니었다.

천명과 혼인한 직후에 용춘은 옛날 자신을 따르던 낭도 가운데 파랑(罷郞)과 찬덕(讚德),

귀산(貴山) 등을 대왕에게 천거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거칠부의 아들 장연(金長沿)과 주령의 조카 탄풍(呑風), 덕활의 손자 어생(漁生)과

고우도도의 아들 고우덕지(高于德志), 동대의 아들이자 대세의 아우인 만세(萬世)와

후직의 아들 일부(金日夫) 등 전대 충신의 후손들에게도 벼슬과 관작을 새로이 내리거나

기왕에 있던 벼슬을 더 높여주어야 한다고 강력히 상고하여 대왕의 허락을 얻어내니,

장연과 탄풍은 잡찬에, 고우덕지와 일부는 일길찬에, 그리고 만세는 대내마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때 길사 한돈도 소사 벼슬에 올랐고, 만노군 태수로 가 있던 무력의 아들 서현도 사찬에서

두 계급이나 승차하여 아찬이 되었다.

이런 일들은 용춘의 생각과 백정대왕의 뜻이 하나로 일치하여 만들어낸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용춘은 진흥대왕 이후 무너진 나라의 근본을 다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오로지 조정의 면모를

일신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고, 선화 공주 사건으로 아우 백반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대왕으로서는 용춘의 이러한 의도를 막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의 등장과 신라 조정의 변모하는 분위기를 누구보다 피부로 절감하던

백반의 세력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만무했다.

각간 임종과 이찬 남승을 비롯한 몇몇 조정의 중신들은 백반의 집에 모여 자주 대책을 숙의하고

어떻게든 용춘을 축출할 묘안을 짜내는 일에 골몰하였다.

용춘과 백반 두 사람에게는 어차피 불가피한 한판 승부가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이가 예상하고 있던 양자의 맞대결은 마침내 신임 병부령의 임용 문제를 두고

표면에 불거졌다.

충신 후직이 세상을 떠난 후 줄곧 공석으로 남아 있던 병부령의 자리를 과연 누구에게

맡기느냐는 것인데, 본래 병부의 책임자는 병부를 만든 법흥왕이 영(令)을 1인으로 두고

뒤에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1인을 더하여 한동안 병부령이 두 사람인 때도 있었으나

진지왕 즉위 이후로는 한 사람에게만 맡긴 것이 관례였다.

이때 용춘이 천거한 인물은 이사부의 장자인 이찬 이리벌(金伊梨伐)이요,

백반이 천거한 인물은 남승이었다.

이리벌은 그 아버지인 이사부의 기개와 지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무장의 자질이 뛰어난 반면에

남승보다 10여 세나 나이가 어렸고, 남승은 비록 무장의 자질은 이리벌보다 덜하나 경륜에서

단연 이리벌을 앞섰다.

대왕이 백관들을 모아놓고 의사를 묻자 이리벌을 말하는 자도 있고 남승을 말하는 자도 있는데,

그 숫자가 제각기 비슷하였다.

이에 용춘이 말하기를,

“병권은 무장에게 맡겨야 나라의 간성을 튼튼히 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리벌이 남승에 비해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 신라 조정에서 이리벌만한 장수가 드물고

선대의 공으로 논하더라도 이리벌을 능가할 자를 찾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이리벌로 하여금 병부령을 삼아 훗날의 방비를 튼튼히해야 할 줄로 압니다.”

하니 백반이 당석에서 이 말을 되받아,

“이리벌이 비록 무장의 자질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가 건품이나 무리굴보다 크게 나은 바가

없는 데다 하물며 지금은 전시가 아니므로 무장의 자질보다는 경륜이 필요할 때요.

전임 후직의 예로 비춰봐도 그가 경륜가이지 칼과 창을 쓰는 명장이란 소리는 못 들었소.”

하고서 이어,

“그대는 말끝마다 선대의 공을 논하고 오로지 선대가 남긴 공덕으로써만 백사의 잣대를 삼아

전하의 성총을 흐리게 하니 나는 그 저의를 알지 못하겠네.

만일에 선대의 공덕으로 벼슬을 논하자면 지금 조정의 백관들 가운데 자격 있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가?

우선은 나와 그대부터 물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선대가 유공한 자는 백에 하나요,

내세울 공이 없는 자는 아흔아홉인데,

만일 그대의 잣대로만 사람을 가려 쓴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나라를 위해 수고로움을 다하겠나?

이는 어제의 일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이요,

죽은 자로 하여금 나랏일을 맡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며 평상에 가졌던 불만을 볼멘소리로 따지고 나왔다.

용춘이 나랏일의 근본을 말하고서,

“충신을 예우하여 그 후손들을 중히 여기는 것은 고금의 도리요,

덕치의 기본이며, 번성하는 모든 나라에서 힘써 지켜온 상규입니다.

 어찌 이를 등한히하겠소?”

하니 백반이 돌연 두 눈을 부릅뜨고,

“그대는 구린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

지금 그대 하나가 들어 백관들 사이에선 유공한 자와 무공한 자의 패가 나뉘고

이견과 파설이 팽배하며 전고에 보지 못한 성군작당이 벌어지고 있다!

이 어찌 평지풍파가 아닐 것이며, 대란의 전초가 아니겠는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도랑물을 흐리게 한다더니

이는 바로 그대를 두고 한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어전임에도 아랑곳없이 목소리를 높여 용춘을 꾸짖었다.

그러나 당하고만 있을 용춘이 아니었다.

“전하의 안전에서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결코 크지 않은 음성으로 눈빛을 매섭게 하여 백반을 노려보니

백반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내 너 따위와 국사를 논하지 않을 것이니라!”

하고는 일어선 채로 왕에게 고하기를,

“신은 충언을 다하였으니 이만 물러갑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나랏일을 혜안으로 살펴 철부지의 말을 무턱대고 좇지 마소서.”

말을 마치자 성큼성큼 어전을 물러났다.

화가 나서 머리 끝이 곤두선 용춘이 급히 백반을 따라 나가려 하였으나

대왕이 손을 들어 말리며,

“참아라. 진정의 언행이야 본래 그렇지 아니한가.”

하고서,

“병부의 영은 나라의 병권을 책임질 수장이다.

무예도 능해야 하나 경륜도 있어야 하고 병법에도 통섭해야 할 뿐더러

병사를 통솔함에 덕도 있어야 한다.

이런 중임을 어찌 함부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며칠 기한을 두고 중신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적임자를 가릴 것이니 경들은 그리 알라.”

하여 좌우를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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