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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유신을 얻다 2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52

제7장 유신을 얻다 2

하루는 서현이 관아에 나가 공무를 보고 있으려니

형리들이 장정 한 사람을 포박하여 데려와서,

“이 자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는 모르나 우리 만노군 사람은 아니옵고,

지난 수일간 매일 일정한 때가 되면 고산에 올라가서 검불을 긁어모아 연기를 피우는 것이

짐작컨대 적과 내통하여 무슨 신호를 주고 받은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게다가 근자에는 군의 동쪽 잉홀현에 도둑 든 집이 한두 집이 아니거늘

이 자가 잉홀현(仍忽縣)에서 바삐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어찌 이 자를 의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고하였다.

서현이 잡혀 온 사람을 보니 머리는 봉두난발인데 복장은 승복 차림이요,

기골은 장대하나 몸이 비쩍 말라 도무지 겉만 보고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서 온 누구냐?”

“나는 일정한 거소가 없이 떠도는 몸이라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없고 이름은 시번이라고 하오.”

사내의 언행이 조금도 공손하지 아니한 것을 본 서현이 속으로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일정한 거소가 없이 떠돌아도 태생지는 있을 것이 아니냐?

네가 만노군에 오기 전에 어디에서 살았더냐?”

“만노군에 오기 전에 개차산군에서도 살았고 당성군에서도 살았고

또 아주 옛날에는 사비성 근방에서 지낸 일도 있소.”

“사비성이라면 백제 땅이 아니더냐?”

서현이 놀라 물으니 사내가 태연자약한 낯으로,

“내가 본래는 백제 사람이오.”

하였다.

이에 형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저 자는 틀림없는 백제의 첩자이옵니다.

형틀에 묶어 문초하면 매일 일정한 때에 고산에서 연깃불로 신호한 내막이

백일하에 드러날 것인즉, 사또께서는 이를 즉시 시행하여 저놈의 죄상을 낱낱이 밝힙시오.

미루는 사이에 혹 무슨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하므로 서현이 곧 형리에게 명하여 형틀을 준비하라 일렀다.

그러나 유신을 낳고 채 이레도 지나지 않은 마당에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내심 기탄스럽고 일변으론 사내가 자발로 백제 사람이라 당당히 밝힌 점도 의아하여,

“너는 어찌하여 고산에서 매일 연기를 피웠는가?”

형틀에 묶기 전에 다시 물으니 사내가 빈정거리듯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나는 다만 살기 위하여 연기를 피웠을 따름이오.”

하고 말하였다.

“살기 위해 연기를 피웠다니? 좀 소상히 말하라!”

서현의 물음에 사내가 돌연 화를 벌컥 내며,

“거 자꾸 구차하게 이러쿵저러쿵 말하라 하지 마시오.

매를 치겠거든 치고 죽이겠거든 죽일 일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소?

어차피 나는 더 살고 싶지도 않소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리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저눔의 자식, 말하는 소리 좀 보게?

손이 발이야 빌어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판국에 도리어 큰소릴세.

이눔아, 여기가 대체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개 꾸짖듯이 꾸짖으니 사내가 형리들을 돌아보고서,

“누가 목숨 부지하기를 바랐더냐?”

반문하고는 의연하게 대꾸하기를,

“내가 이미 골백번도 더 말하지 않았던가?

연기를 피운 까닭은 토굴 속에 숨은 짐승을 잡기 위함이지 다른 뜻이 없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고 굳이 예까지 데려왔으니 무슨 말을 더 하랴.

잉홀현에서 도둑 든 집이 숱하다고 하였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밥 훔쳐먹은 것은 나고,

나는 배가 고파 밥은 훔쳐먹었을지언정 사람을 해치거나 재화를 훔친 일은 없다.

벌써 사흘을 굶은 터라 말하는 것조차도 힘드니 어서 뜻대로 하라.”

말을 마치자 스스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형틀에 누웠다.

서현이 사내의 거동을 찬찬히 살핀 뒤에 격분하는 형리들을 제지하며,

“저 자를 내당으로 불러 배불리 밥을 먹이라. 그런 연후에 다시 보리라.”

하니 성보가 사내를 안채로 데려가서 상에 그득히 먹을 것을 차려주었다.

사내가 상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더니 돌연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먹지 못하겠소.”

하므로 성보가,

“배가 고파 말할 힘조차 없다던 사람이 어째 음식을 보고 마다하는가?”

하고 까닭을 물었다.

사내가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게는 위로 봉양하는 양친이 있고 밑으로 자식이 일곱인데

이들이 한결같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로지 내가 먹을 것을 구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소.

이를 아는 내가 어찌 혼자만 살겠다고 이 음식들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겠소?”

“하면 식솔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지난해까지는 모다 백제 땅에 살았는데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소.

내가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요.”

성보가 사내의 말을 듣자 왈칵 불쌍한 느낌이 일어나 서현에게 이 사실을 고하니

서현이 혀를 차며 말하기를,

“그가 비록 백제 사람이라고는 하나 사정을 듣고 보니 내 마음이 아프네.

나라에 기근이 들면 백성들이 굶는 것이야 당연지사요,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는데 어찌 내 나라, 남의 나라 구분이 있을 것인가.

예로부터 어진 임금은 남의 나라 백성들까지도 긍휼히 여겨 도움을 청하면

마다하지 아니하였고, 덕망 높은 관리는 이웃 군민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면

기꺼이 제 관아의 창고를 열어 의로써 이를 돕는다고 하였네.”

하고서,

“만일 나라에서 내가 백제 사람을 도운 것을 알면 어떻게 여길지 모르나 나는 일찍이

신라와 금관국이 병합한 얘기를 들으며 나라보다는 사람이 중한 것을 배웠네.

예전에 내 아버지 무력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이란 본래 지경을 넘나드는 것이

물이나 바람과 같아서 좋은 곳이 있으면 오고 마음에 싫으면 가기도 하는 법이라

비록 적국의 사람을 대할 때도 항시 덕을 생각하고 예를 잊지 말라고 하셨거니와,

내 어찌 그 말씀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시번이란 자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즉시 방면하여 백제 땅에 산다는

그의 식솔들을 시급히 구제하도록 하게나.”

하니 성보 또한 기뻐하며,

“과연 나으리십니다.”

하고는 그 길로 사내를 풀어주고 얼마간의 양식까지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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