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7장 유신을 얻다 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58

제7장 유신을 얻다 7

용춘과 백반의 첫번째 싸움은 이렇듯 용춘의 완패로 막을 내렸다.

이튿날 대왕은 편전에서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무릇 사람과 자리를 논할 적에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경륜이다.

경륜이 없는 자는 지위가 높아도 그 높은 지위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고,

지위를 빙자하여 재화를 탐하고, 마침내는 자신의 근본을 망각한 채

어지러운 무리와 휩쓸려 불충의 길을 걷기도 하는 법이다.

이에 비하여 경륜이 있는 자는 비록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과 주변을 빈틈없이 돌보고 다스려 결국에는 그 존재와 이름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하고서,

“이찬 남승은 오랫동안 과인을 도와 나랏일을 맡아온 사람으로 만조를 통틀어

남승만한 경륜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이찬 남승으로 하여금 병부의 일을 맡기고자 하니 남승은 죽은 후직의 뒤를 이어

나라의 지경과 간성을 살피고 튼튼히하는 일에 신명을 바치도록 하라.”

하니 남승이 감읍하여 이마를 땅에 박고,

“신 남승, 전하의 지엄한 왕명을 받들어 마소의 도리를 다하겠나이다.”

하였다. 대왕이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 후에 부언하여 이르기를,

“또한 근자에 이르러 선대의 공덕으로 벼슬과 관작이 높아진 자들이 더러 짐에게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고 당을 지어 다니며 여러 가지 불충한 말들을 늘어놓는다고 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

게다가 중신들 사이에선 이것으로 패가 나뉘고 무리를 달리하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니

이 역시 깊이 생각하자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하고는 즉시 위화부에 명하여 문제가 된 자들의 관작을 빼앗거나 지방의 관리로 좌천시키라는

영을 내리니, 이사부의 아들 이리벌은 벼슬이 이찬에서 파진찬으로 두 계급이나 강등되었고,

거칠부의 아들 장연과 주령의 조카 탄풍은 의논 끝에 잡찬의 벼슬을 스스로 내놓았으며,

고우덕지와 일부는 변방의 군주로 갔다.

그리고 덕활의 손자 어생과 동대의 아들 만세도 지방의 태수로 좌천되었다.

이때 비록 선대의 공덕은 없으나 용춘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갔던 찬덕과 귀산 등도

지방의 태수와 현령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찬덕만이 명을 받들었을 뿐 귀산은 자청하여 벼슬을 버렸고,

특히 용춘의 낭도였던 파랑은 별다른 일이 없었음에도 사직을 원하여 물러나니

병진년 이후 용춘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갔던 거의 모든 이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셈이었다.

수족이 한꺼번에 된서리를 맞는 판에 용춘인들 무사할 리가 없었다.

이에 자세한 내막은 알지도 못한 채 단지 왕명에 따라 벼슬을 내놓고 물러났는데,

그 뒤로도 조정의 탄핵이 잇따르자 대궐에 출입을 금하라는 금족령까지 내려졌다.

이때가 건복 14년, 정사년(597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한편 금왕의 신임과 훗날의 왕통을 둘러싼 용춘과 백반의 보이지 않는 암투는

왕실 태후들 사이에도 그 여파를 고스란히 미쳐 이듬해 봄에는 진흥왕비 사도 태후가

머리를 깎고 금성의 영흥사(永興寺)로 들어가 묘주(妙住)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었는데,

영흥사는 전날 법흥왕비인 보도 태후 박씨가 창건한 절로, 진흥왕의 섭정을 마친 박씨가

말년에 출가하여 법명을 묘법(妙法)이라 하고 입적할 때까지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그해 여름에는 신라의 명장 고우도도가 죽었고,

그로부터 얼마 아니 있어 숙흘종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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