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6장 세 공주 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41

제6장 세 공주 3

거기서 사오십 보를 더 보태었을까.


문득 무성한 수풀 속에서 천지가 요동하는 범 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산길 모퉁이로 황소만한 호랑이 한 마리가 유유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선두에서 망을 보며 가던 호위병이 범을 보는 순간 뒤로 벌렁 자빠져 일어나지 못하고,

뒤에 있던 군사들은 서둘러 창과 칼을 뽑아 들었으나 그 기세가 범의 고함 한 번이면

당장 무기를 팽개치고 달아날 듯이 허약했다.

선화가 범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자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어디야? 범이 어디에 있어?”



하고 고개를 빼내어 두리번거리다가 정작 20여 보 앞에 엉버티고 선 범을 발견하고는,



“에그머니!”



하며 궁녀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두관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난감해 있으려니

그 호랑이가 사람들을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이 몇 차례 계속해서

눈만 끔벅이다가 어흥, 어흥 헛기침만 하고는 그대로 맞은편 숲속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두관으로서는 실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따라온 호위병 중 활깨나 쏜다던 직수(直首)라는 이가 있었는데,

사람을 해치지 아니하고 사라지는 범을 보자 은근히 마음속에 호기와 욕심이 생겼다.

문득 두관과 공주의 앞으로 나서며 고하기를,



“제가 명색이 명궁 소리를 듣는 처지로 저 범을 한번 잡아 보이겠습니다.”



하니 먼저 두관이 이르기를,



“스스로 피하여 가는 범을 잡아 무엇하느냐.

그러다 자칫하여 선불이라도 맞으면 달려들까 무섭다.”

하고 만류하였다.

직수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저 범이 사람을 보고도 그냥 갔으니 언제 와도 다시 올 것이오.

차제에 후환을 없이 해두는 편이 옳겠습니다.”



하자 공주가 나서서, 


“너의 말이 옳다. 저 범이 이쪽의 사람 많은 것을 보고 무리를 데리러 가는 것인지도 모르니

어서 죽여 화근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직수가 등에서 활대를 내리고 살통에서 화살 한 대를 뽑아 급히 범이 사라진 숲으로 달려갔다. 


“어흐흥!”



조금 뒤에 울창한 숲에서 범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범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를 발소리가 한동안 요란하더니

한참 만에 직수가 털레털레 맥빠진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어찌 되었나?”



호위장 두관이 묻자 직수가 금방이라도 범을 죽여 떠메고 나올 듯하던 당초의 기세와 달리, 


“범이 화살에 맞은 것은 분명하나 생사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아무리 쫓아가도 종적이 묘연해요.”



여기까지는 자신없이 말하고서 공주와 궁녀들 있는 쪽을 힐끔 훔쳐본 뒤에,

“그러나 십상팔구는 굴에 가서 죽어도 죽을 것이니

방금 본 그 범 걱정은 안해도 될 겁니다.

다 얻어놓은 범의 가죽이 아까울 뿐입지요.”



이 소리는 매우 힘차게 하였다.

두관이 선화 공주에게,



“이쯤하면 호재 구경도 하고 범 구경도 하였으니 그만 내려가는 것이 어떨는지요?”

하며 의향을 물으니

좀 전까지만 해도 범을 보고 입술이 새파랬던 선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것만 가지고서야 무슨 얘깃거리가 되려구?

내가 범을 보아도 설보았으니 조금만 더 올라갔다가 돌아가세.”

하였다.

두관이 속으로 공주를 욕하며 길을 재촉하여 가는데,

선두에서 범을 보고 자빠졌던 자가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직수를 앞세우고 갔다.

그러구러 산길 10여 리 길을 더 보태었을 때다.

제일 앞장섰던 직수가 돌연,



“범이다!”



하고 고함을 질러 모두들 보니 과연 길 앞에 범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는데,

잔등에 부러진 살대 하나를 꽂고 있는 것이 먼저 만났던 바로 그 호랑이였다.

한데 먼저 만났던 호랑이는 사람을 보고도 스스로 피하던 온순한 호랑이였으나

이번에 만난 호랑이는 눈알에 시퍼런 불을 켜고 어깨를 잔뜩 내린 채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포악한 맹수였다.

당황한 두관이 호위군사 몇 명과 다급히 무기를 꼬나들고 직수 역시 시위에 화살을

먹이는 동안 호랑이의 우렁찬 포효 소리가 쩌렁쩌렁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리곤 별안간 비호로 돌변하여 사람의 무리를 보고 달려드는데,

그 시간이 실로 눈 한 번 깜짝하고 손가락 한 번 튀길 동안이었다.

범이 낯을 아는 듯이 제일 먼저 덮친 사람은 직수였다.

엉겁결에 직수가 쏜 화살은 이미 어이없이 빗나갔고 대신에 으앙,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날아온 범의 앞발이 직수의 어깨를 후려쳤다.



“아악!”



직수가 비명을 지르며 범을 안고 뒤로 누우니 범이 직수의 목에 주둥이를 박고 꼬리를 흔들었다.

직수가 사지를 버둥거리는 동안 범은 직수의 목을 문 채로 나머지 사람들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동료가 범에게 물려 죽어가는 것을 본 호위병들은 오금이 얼어붙은 듯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직수를 구하라는 두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사지를 벌벌 떨어대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마침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뿔뿔이 도망갔고,

그러는 사이에 버둥거리던 직수도 서서히 조용해졌다.

범이 직수의 목에 박은 피 묻은 주둥이를 쳐들고,



“어흐흥!”



하며 큰 소리로 포효하였다.

두관이 보니 이제 자신이 범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뒤에는 궁녀들과 선화가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몸을 사시나무 떨 듯이 떨어댈 뿐이었고,

병사들의 모습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두관은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너희들은 어서 공주님을 뫼시고 산길을 내려가라. 이곳은 내가 맡으마.”


일변으론 창끝을 범에게로 겨누고 일변으론 궁녀들에게 급히 이르니

이 말을 들은 궁녀들이 선화를 호위하여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잰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선화가 궁녀들에게 휩싸여 산길을 부랴부랴 내려오면서 허둥지둥 사방을 둘러보니

상악서부터 줄곧 뒤를 밟던 몇 패의 낭도들이 그날따라 한 무리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에 선화가 궁녀들에게 명하여 고함을 지르도록 하자 궁녀들이 입을 맞추어,



“사람 살려요! 누구 없습니까!

선화 공주님이 산에서 범을 만났으니 누구라도 나서서 구해주세요!”



하며 팔방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대여섯 번이나 계속해서 고함을 질러도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메아리뿐이었다.

선화가 마침내 두관의 말을 듣지 않고 호재에 든 것을 깊이 뉘우치며 크게 낙담하는 중에

문득 한 궁녀가 안색이 백변하여, 


“범이다, 범! 저기도 범이 있다!”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선화가 그 궁녀의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또 다른 호랑이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그놈은 크기가 집채만하고 생김새도 먼젓번 범보다 훨씬 사나웠다.

혼비백산한 궁녀들이 다투어 비명을 내지르느라 사방이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뒤에도 범이요 앞에도 범이라 이젠 피신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범을 상대로 싸울 형편도 아니었다.

이젠 꼼짝없이 범의 밥이 되는 수 뿐이라고 생각한 선화가 만사를 체념하고

앞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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