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5장 인연(因緣) 13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37

제5장 인연(因緣) 13

대궐에서 보낸 사신이 서현의 집에 당도하여 왕명과 사령장을 전하고 가자

이제 남은 것은 외가의 규방에 갇힌 만명을 어떻게 쥐도 새도 모르게 빼내 가느냐는 문제였다.
 
서현은 고사하고 용춘조차도 이 대목에 이르러선,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일만큼은 내가 나설 수 없으니 답답하이.”

하며 난감해하였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몇 날을 숙의해도 좀체 묘책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애꿎은 날짜만 흘러서 급기야 서현이 만노군에 부임해야 할 날이 코앞에 이르렀다.

용춘은 숙흘종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하는 수 있는가? 자네와 내가 야밤에 복면을 쓰고 담을 넘음세. 발각이 나도 그만이네.”

하였고 서현은 기왕 숙흘종의 당부를 무시할라치면 하인들을 매수하는 편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때 서현의 집에 얹혀 지내던 성보가 두 도령의 설왕설래하는 것을 바깥에서 엿듣고,

“도련님들께서 무슨 일로 싸우십니까?”

하고 참견하여 사정 얘기를 듣고 나더니,

“그런 일이 있거든 진작에 소인을 불러 물어보시지요.”

하고는,

“소인이 천문을 보아하니 명일 밤 유시 어름에 반드시 금성에 뇌성이 울고

사람과 귀신이 다 같이 놀랄 만큼 큰 벼락이 쏟아질 것입니다.

이 틈을 타서 만명 아씨를 데리고 나온다면 설령 귀신이라 한들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두 도령이 동시에 귀가 번쩍 틔었다.

성보가 이미 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가기를 작정한 사람이라,

“도련님은 만노군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고 거기(車騎)를 준비하여 기다리고만 계십시오.

소인이 담을 넘어 아씨를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하여 서현의 표정이 모처럼 환하였는데,

막상 뒷날 오후가 될 때까지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아니하니

아무리 성보의 재주를 믿는 서현이지만 한가닥 불안한 느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이 이처럼 좋은데 벼락이 꼭 치겠는가?”

해가 중천을 지난 후로 서현이 몇 번이나 성보에게 물었지만

그때마다 성보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염려하지 맙시오.”

태연히 대답하고는,

“해만 떨어지고 나면 반드시 하늘의 조화가 있을 것입니다.”

입찬소리까지 덧붙였다. 해질 무렵에 서현이 노모의 방에 가서 하직 인사를 하고

말과 수레를 준비하여 집을 나섰다.

이때 용춘이 퇴궐하여 와서 삼자가 만명의 외가 근처에 이르렀는데,

아니나다를까 별안간 서편의 붉은 황혼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먹구름에 뒤덮여 빛을 잃더니

순식간에 세상이 암흑 천지로 돌변하였다.

용춘이 하늘을 바라보며,

“과연 성보가 말한 대로라 일은 어렵잖겠으나 비가 되우 쏟아질 모양이니 원로에 고생하겠네.”

걱정스레 말하자 성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고 오직 뇌성과 벼락만 요란할 것입니다.”

하고서,

“이것이 어찌 천우신조가 아니오리까.

한데 이처럼 하늘과 귀신이 다 함께 돕는 것이 서현 도련님과 만명 아씨의 복도 되지마는

궁극에는 앞으로 태어날 아기씨의 복이요,

그 아기씨가 보통분이 아니기 때문이올시다.

근자에 금성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모두가 사람의 일이요,

뱃속의 아기씨가 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사람의 일로 어찌 하늘의 뜻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차차 두고 봅시오마는 전고에 아무도 얻지 못한 큰 인물이

서현 도련님의 슬하에서 나올 것입니다.”

신통한 소리를 내었다.

이 말을 들은 서현은 돌연 흐뭇하여,

“복이 누구에게 있건 과히 듣기 싫은 말은 아님세.

이 난리를 치고 나오는 놈이니 인물은 인물일 테지,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용춘은,

“하면 뱃속에 든 아이가 보나마나 사내아이겠네?”

하여서 성보가 십상팔구는 그럴 것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삼자가 저만치 만명의 외가가 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중에 하늘에서

연신 꾸룩꾸룩 배 앓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벼락이 치고 뒤이어 뇌성 소리가

천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이에 길을 지나던 아녀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종종걸음을 치고 짐승들은 놀라

길길이 뛰었으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노인도 있었다.

성보가 사방을 살피며,

“조금 후에 대문이 열리거든 집 앞으로 수레를 끌고 오십시오.”

하고는 벼락친 직후의 짙은 어둠을 틈타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갔는데,

다음 벼락이 떨어질 때 보니 어디로 갔는지 그 종적이 묘연하였다.

성보가 재빨리 담을 넘어 만명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자

만명이 성보의 얘기를 전해 듣고 크게 기뻐하다가,

“그런데 대문 앞에 늘 지키는 사람들이 있으니 어찌 그곳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겠소?

내가 홀몸이라면 월담도 못할 것이 없네마는……”

하며 걱정을 하였다.

성보가 만명의 짐을 대신 들고 살금살금 발소를 죽여 대문 근처로 가보니

과연 건장한 하인 두 사람이 범 같은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는지라,

“아씨는 이곳에서 기다리다가 벼락이 대문을 때리거든 급히 나오십쇼.

소인은 바깥에 나가서 대문을 때릴 벼락을 만들어 보리이다.”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넘어왔던 담을 도로 훌쩍 뛰어넘었다.

밖으로 나온 성보가 집 앞에 기다리고 있던 서현과 용춘에게로 가서

조곤조곤 집안의 사정을 설명하자

두 사람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팔을 둥둥 걷어붙였다.

세 장정이 대문 앞으로 걸어가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하늘에서

마침 벼락불 떨어질 때를 맞추어 한꺼번에 냅다 문을 밀치니

어설프게 빗장을 질러놓았던 목문이 쓰러진 것은 고사하고 그만 통째로 박살이 났다.

이 바람에 문 안에 있던 장정 두 사람이 쓰러지는 문설주에 머리를 맞고 잠깐 혼절하자

만명이 그 틈을 빌려 무사히 달아났는데, 나중에 정신을 차린 장정들이 만명의 일은 통

알지도 못한 채,

“이 세상에서 벼락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이렇게 멀쩡한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을 걸세.”

이구동성으로 이런 소리를 떠벌리고 다녔다.

용춘이 금성의 서북편 경계까지 서현 일행을 따라갔다가 마침내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종수일별(終須一別)이니 여기서 그만 헤어짐세. 아이를 낳거든 통기하게나.”

하자 서현이 말에서 내려 용춘의 손을 마주잡으며,

“내가 자네의 도움으로 무사히 금성을 떠나네. 틈이 나거든 만노군에 꼭 한번 다녀가게나.”

하였는데, 양자가 헤어지는 것이 애운하여 눈에 눈물을 글썽이고 돌아서 가면서도 몇 번이나

서로 되돌아보곤 하는 것이 마치 영영 만나지 못할 사람들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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