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인연(因緣) 11
그럴 무렵에 숙흘종의 집으로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용춘이었다.
용춘이 벼슬길에 나온 뒤 어전에서 직접 한돈의 억울함을 고하여 왕이 의방부에 내린
한돈의 수배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전날 다니던 길사 벼슬에 관직까지 그대로 복원해주었다.
이에 한돈이 압량주 골평의 집에서 식솔들을 모두 데려와 전에처럼 다시 월성 남쪽에서 살았고,
성보는 금성에 오자마자 서현의 집으로 이끌려가서 빈방 하나를 차지하였다.
용춘이 하루는 서현이 만명의 일로 크게 고민하여 침식조차 거르고 있다는 소식을
성보에게서 듣고 집으로 서현을 찾아갔다.
서현이 과연 시름에 가득 찬 얼굴로 용춘을 맞으니 용춘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이 사람, 다시 봐야겠네! 장부가 그깟 일로 죽을상인가?
나 같으면 칼이라도 뽑아 들고 당장 만명 고모네 집으로 쳐들어갔겠네!”
하고 서현의 용기 없음을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서현이 웃지 아니하고 만명의 일을 태산같이 걱정하며 거푸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말게. 나야 어째도 좋지만 홀몸도 아닌 만명 낭자가 이번 일로 크게 경을 치르고 있다 하니
그 연약한 몸에 축이나 안 갔는지 모르겠어. 엊그제는 낭자의 집 앞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으이.
내가 마음 같아서는 숙흘종 어른을 찾아뵙고 사죄라도 하고 싶으나 그러자니
도리어 낭자의 처지가 더욱 곤란해질까봐 굽지도 접지도 못하고 있네.
앉은뱅이 앉아서 용만 쓴다고, 이러니 내 심정이 오죽이나 답답할 것인가.”
“아니 그럼 자네는 이만한 일도 안 겪고 나의 당고모부가 되려고 하였나?
그러하고 본래 미인을 얻자면 곡경을 되우 치르는 법이야.”
용춘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니 서현이 용춘을 향하여,
“자네야 당자가 아니니 흰소리가 자꾸 나오는 모양이네만
지금 내 형편이 그렇지가 않네. 죽을 맛일세.”
여전히 맥빠진 대꾸를 하였다.
용춘이 그런 서현을 시종 웃음기 서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내가 자네의 덕으로 취산의 은둔자 신세에서 하루아침에 예부령 노릇까지 하게 됐으니
이번엔 어디 그 신세나 한번 갚아볼까?”
하자 서현이 몇 차례 눈을 끔벅이다 말고,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나?”
급히 무릎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이에 용춘이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건대 이 일은 만명 고모가 왕실의 사람이기에 생긴 일일세.
만일에 만명 고모가 여염의 여자라면 당자들만 알고 얼마든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인데
오직 왕실의 사람인 탓에 만가지 구설이 횡행하는 거라네.
전날 붕어하신 전왕 폐하께서 사량부의 도화녀를 궁으로 데려왔을 때도
그에게 지아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되돌려보냈지만
그 후로 온갖 추문과 구설이 횡행하지 않았던가?
그 일과 지금 자네의 일이 매한가질세.
본래 왕실이나 왕가의 소문들이 그런 법이라네.
따라서 자네나 만명 고모가 계속 금성에 머물러 있는 한은 구설을 잠재우기 어려우이.”
“하면 도망이라도 가라는 말인가?”
“도망? 그렇지, 도망은 도망이지.”
“예끼, 이 사람! 그것이 무슨 계책인가?
나는 도망갈 이유가 없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도망이야?”
서현이 버럭 화를 내자 용춘이 조용한 어조로,
“반드시 죄를 지어야 도망을 하나?
그럼 자네는 내가 물경 예닐곱 해나 취산에서 은둔한 것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 여기는가?”
하고 반문하였다.
“……자네의 일과 내 일은 다르지.”
“다를 것이 없네. 자고로 길이 다하는 곳에 새 길이 열린다 하였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낭지대사의 말일세.
낭지대사가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통한 사람이지 뭔가.
내가 취산을 내려올 적에 대사가 은밀히 나를 불러 말하기를,
서현 도령이 곧 관재구설에 휘말릴 터이니
그때는 아무렇게 하라고 일러준 얘기가 있었다네.
한데 막상 그런 일을 맞이하고 보니
그 때며 돌아가는 판세가 대사의 말한 바와 한 치도 어긋남이 없으이.”
“스님이 이같은 곡경을 미리 알았다 하였나?”
서현이 눈을 휘둥그래 뜨고 되물었다.
“그렇다네.”
“하면 도망가라는 얘기도 스님의 뜻인가?”
“말이 도망이지 자네더러 가라는 도망은 도망도 아님세.
그저 세상에서 구설이 잠들 동안만 지방의 사신(仕臣)이나 태수로 나가 살라는 게지.”
용춘의 말에 서현이 비로소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골똘히 상념에 잠겼다.
“자네의 선친이신 무력 장군께서도 젊어서는 지금의 남천주인
신주도의 군주로 나가 계셨던 일이 있지 않은가?
대사가 권하는 곳도 거기서 멀잖은 만노군일세.”
“만노군?”
서현이 문득 만노군이란 이름을 들으매 전날 취산을 내려오며 낭지의 움막에
하직 인사를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낭지의 시자인 담수가 전한 말이 훗날 대사가 만노군에서 만나자 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일변 생각하니 자신이 만노군에 가겠다고 어디 마음대로 갈 수 있을 것이며,
설혹 만노군에 간다 한들 만명을 거기까지 데려갈 수가 있을 것인가.
서현이 이 말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니 용춘이 웃으며,
“대사가 아무려면 불가능한 일을 내게 말하였겠나.
자네의 마음만 결정이 나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함세.”
장히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므로 서현이 드디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어딨어.
나는 만명 낭자와 더불어 같이 지낼 수만 있다면 지옥에 간다 해도 상관없으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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