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5장 인연(因緣) 10 회

오늘의 쉼터 2014. 7. 19. 09:26

제5장 인연(因緣) 10

이때 만명과 한집에 살던 올케 가운데 왕실 사람이 있어 소문은 이내 만호 태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동륜비 만호 태후가 젊은 나이로 조카인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사저에 나와 살다가 장남 백정이

즉위한 후에 다시 궁으로 들어간 사람인데 그 성품이 완악한 데가 있고 용심이 많았다.

은근히 막내 자부로 마음에 두고 있던 오빠의 딸이 처녀의 몸으로 수태까지 했다는 말을 듣자,

“말세로다. 요즈음 젊은 애들의 풍속이 아무리 어지럽고 경박하다 한들 어찌 지엄한

왕실의 여식으로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이는 저자와 여염에서도 해괴한 일이다.”

크게 탄식하고서 그 내통한 상대를 물으니

서현이라는 진골 청년이라 하므로 더욱 가슴을 쳤다.

“어디 사람이 없어 하찮은 진골 청년과 짝을 이룬단 말인가?

이는 사람의 도리와 나라의 법에 모두 어긋난 일이다.

이제 보니 숙흘종 오라버니가 다른 것은 몰라도 딸을 훈육하는 데는 크게 실패한 사람이구나!”

만호 태후가 원통한 나머지 백정대왕을 찾아가서 만명의 일을 거론하였다.

“이 일로 왕실의 품위가 크게 손상됨은 물론 전왕이 사량부의 유부녀 도화를 궁에 불러들여

추문에 휩싸인 이래로 또다시 왕실의 일이 백성들의 입초시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만명을 할보하여 왕도에서 멀리 추방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 줄로 아오.

내 생각은 그렇거니와 우선 상이 숙흘종 어른을 불러 뜻을 물어보오.

숙흘종 어른이라면 누구보다 이 나라 왕실의 체통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반드시 남다른 뜻이 따로 있을 것이외다.”

대왕 역시 만명을 익히 아는 터라 처음 얘기를 들을 때는 실망이 컸다.

그러나 그 상대가 서현이라는 소리를 듣자 돌연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만명이 그런대로 짝을 잘 찾았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즉시 사람을 숙흘종의 집으로 보내 궁으로 청하였다.

숙흘종이 그를 따라 입궐하여,

“실로 면목이 없나이다.”

하고 얼굴을 붉히니 대왕이 먼저 만호 태후의 뜻을 전한 다음에 이르기를,

“작은할아버님을 모신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따로 도울 일이 없나 해섭니다.

과인의 뜻은 어마마마와는 다소 다릅니다.

만명이 비록 처녀의 몸으로 외간 남자와 잠통하여 수태를 했다고는 하나

격식에 얽매여보지 않는다면 배필을 구한 것이니 경사요,

다만 예를 올리지 않았을 뿐 처녀 총각이 만나 저지른 일이니 과히 추문이랄 것도 없지요.

예로부터 남녀지간의 일이란 묘한 데가 있어서 귀신조차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한다지 않습니까?

항차 그 상대가 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이라고 하니

만명이 외눈으로 사람을 구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하고서,

“사람들의 입초시에 더 오르내리기 전에 서둘러 짝을 지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숙흘종이 읍하여 고하기를,

“상의 심려를 끼쳐드려 입이 열이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고서,

“상대가 누구이건 이번에 만명의 일이 극히 몰풍정하고 왕실의 사람으로

권위와 체통을 훼손시킨 것은 분명하니 그 책임은 물어야지요.

신이 각방으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하루 이틀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그때 따로 소청이 있으면 입궐하여 아뢰겠나이다.”

하였다.

숙흘종이 집으로 돌아와서 만명을 불러 앞에 앉히고,

“금지옥엽 기른 네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이같은 일을 함부로 저질러

온 나라에 우스갯감이 되고 보니

너를 낳은 아비로서 실로 착잡하고 통탄스러운 마음 한량이 없구나.”

비로소 근엄한 얼굴로 꾸짖으니 만명이 무릎을 꿇고 앉아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 너는 어찌하여 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내게 상의 한마디가 없었더냐?”

숙흘종이 묻자 만명이 옷고름으로 눈시울을 닦고 이내 대답하기를,

“소녀가 사전에 말씀을 올리지 않은 것은 잘못한 일입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을 드렸다 한들 집에 허락을 얻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혼사를 서둘러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일생을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두려웠습니다.”

낭랑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숙흘종이 만명을 바라보니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너는 이 일을 몹시 떳떳해하는 듯하구나?”

“자랑스러울 것도 없으나 크게 떳떳치 못할 바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그렇느냐?”

“소녀가 서현 도령을 알고 나서 첫째로는 그 사내다운 풍모에 반하였고,

둘째는 그가 무력 장군의 아들이란 점에 반하였으며,

셋째로는 그와 더불어 알천을 노닐며 여러 가지 말을 나눈 끝에 반듯한 뜻과

또한 저를 누구보다 아끼고 위하는 마음에 반하였습니다.

배필을 구할 적에 이보다 더 중한 것이 또 있습니까?

그럼에도 집에서는 저의 짝을 구한답시고 사람의 됨됨이와 인성은 보지도 아니하고

오로지 혈통과 가문만을 중히 여기니 설령 왕비가 된다 한들 소녀가 어찌 흡족할 수 있겠나이까.”

만명의 당찬 대답에 숙흘종이 문득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지금 오라버니들과 올케들 말이,

서현 도령이 미천한 진골 청년이므로 더욱 문제가 된다고 하는데,

소녀가 듣기에는 이 말이 도무지 모를 말이라 그러잖아도 아버지께 꼭 여쭙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모를 말이냐?”

“아버지께서도 서현 도령이 미천하다고 여기시는지요?”

“성골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이 아니더냐?”

“만일에 그렇다면 저는 아버지께도 실망을 금할 길이 없나이다.”

“무엇이 그리 실망인고?”

“저는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께서 무력 장군의 공을 높이 평가하시는 말씀을

골백번도 더 들으며 자랐습니다.

무력 장군으로 말하자면 금관국 구해대왕의 둘째 아드님으로 우리 신라에 와서

신라 사람이 되었거니와 그 고귀한 신분을 저버리고 몸소 말잔등에 올라

일평생 진흥대왕을 도우며 드디어는 우리 신라의 왕업을 반석 위에 올려두신 분이니

그 용맹스러움으로 말하면 조(趙)나라의 염파(廉頗)를 능가하고,

기개로 일컫자면 초한(楚漢)의 두 영웅 항우와 유방에 버금가며,

공으로 말하면 흉노의 난을 평정한 한(漢)나라 장수 이광(李廣)에 견줄 만하다고

매양 극찬하지 않았습니까?

무력 장군이 나라에 세운 공은 진흥대왕의 다섯 신하 가운데에서도 첫째가 아니면 둘째요,

오늘의 왕실과 나라의 태평함이 그분 덕택에 있는 것인데,

지금에 와서 돌연 그 출신을 미천하다 하고 그분의 자제를 능멸하는 것은

대저 연유와 까닭이 어디에 있음인지요?

또한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과 그 식솔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지금 나라의 가장 큰 우환이라고 아버지께서 매양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사온데,

이것과 서현 도령의 일이 어떻게 다른지 소녀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만일에 서현 도령이 진실로 미천하다면 아버지께서는 일평생 허언(虛言)만을 일삼은 분이요,

그것이 아니라면 아버지께서 나서서 미천하다 말하는 자들을 꾸짖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숙흘종이 들어보니 만명의 따지는 바가 구구절절이 이치에 닿는 소리여서

아무것도 탓할 것이 없었다.

한동안 입맛을 쩍쩍 다신 연후에 가까스로 입을 열어 대꾸하기를,

“서현 도령이야 성골이 아닐 뿐이지 그 출신이 미천할 턱이 있느냐.”

하고는 이어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다만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까, 종시 그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하고 넌지시 본심을 일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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