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인연(因緣) 12
용춘이 서현의 집을 나와 그 길로 숙흘종을 찾아갔다.
숙흘종이 용춘을 반갑게 맞이하여 앉으니 용춘이 서현과 만명의 얘기를 꺼내며,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어찌 해결을 하려 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숙흘종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서현이 나의 사위가 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기리요.
신분이야 어쨌든 그만한 청년이 다시 있는가.”
작금의 고민이 서현의 됨됨이에 있지 않음을 처음으로 밝혀 말하고,
“문제는 왕실의 체통이니 내가 만일 이 혼사를 허락하면 세간의 입방아에 오래도록
오르내릴 것이며 허락하지 아니하면 이는 내 뜻이 아닐 뿐더러 만명과 서현에게도
마음에 큰 상처를 주는 것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구나.”
하였다.
용춘이 아뢰기를,
“명분도 세우고 두 사람도 원하는 대로 해주는 묘책이 있습니다.”
하고서,
“만명 고모를 집에서 내쫓아 적당한 곳에 가두어놓으면 이는 처녀의 몸으로 수태한 것을
꾸짖는 일이므로 왕실의 체통을 살리는 길이요,
그런 뒤에 서현으로 하여금 만명을 꾀어 도망하게 한다면 이는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이니
마음에 상처를 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세간에 횡행하는 구설이야 길어도 한두 해를 넘기지 못하리이다.
나중에 가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서현이 나라에 큰 공이라도 세운다면 만사가 저절로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제안하였다.
아울러 덧붙이기를 우선 서현에게 만노군 태수쯤을 봉하도록 왕께 간청을 넣어 윤허를 얻어내자
하면서,
“전하께 간청하는 일은 할아버지께서 하셔도 좋고 제가 해도 무방합니다.”
하였더니 숙흘종이 매시근히 앉아 한참을 대답이 없다가,
“네 말이 옳다. 내 생각으로는 구설이 잠들 때까지 만명에게 머리를 깎게 하여
절로 보내려 하였는데 너의 말하는 바가 한결 윗길이다.”
하고서,
“전하의 윤허를 받아내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너는 서현에게 가서 이달 하순에 만명의 외가로 가라고 일러라.
그러나 이것을 드러나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만명을 데려간 자가 서현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만노군이라고 해서
구설이 쫓아가지 않을 리 없고, 나 또한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느냐?
하니 외가 식솔들이나 하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재주껏 데려가되 만명을 데려간 자가
누군지를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느니라.”
하고 엄히 잡도리를 하였다.
이튿날 숙흘종이 집안 식구들이 모두 보는 데서 만명을 불러 문득 목소리를 높이하고
크게 꾸짖기를,
“나는 너와 같은 여식을 둔 적이 없다. 어디 처녀의 몸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외간 남자의 씨를 받아 수태까지 하였더란 말이냐? 이는 좁게는 가문의 치욕이요,
나아가 이 나라 왕실의 큰 수치다.
너의 소행으로 보면 할보를 하여 문중에서 너의 부끄러운 이름자를 제하여야 마땅하나
그 절차조차 귀찮으니 대신에 너를 쫓아냄으로써 너와 나의 부녀지연을 끊으려 한다.
너는 오늘로 당장 이 집을 떠나 두 번 다시 내 앞에 현형하지 말라!
살든 죽든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눈에 불을 켠 채로 나무라고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휭하니 들어가니
좀처럼 숙흘종의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집안 사람들이 모두 제가 꾸지람을 들은
양 자라목을 하고 어깨들을 옹크렸다.
선모부인은 심란한 중에도 만명이 불쌍하여 눈물을 흘렸고 시초에는 할보를 주장하던
오빠들도 더는 말이 없는데, 특히 정이 많은 막내오빠 을제(乙祭)는 누이의 손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앞으로 아버지께서 마음을 되돌릴 때가 있을 것이니
당분간 외가에 가서 근신하며 지내도록 해라.”
하고 살가운 소리로 다독거렸다.
이에 쑥덕거리던 올케들조차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 하나씩을 모아가지고 와서,
“어디를 가든 재화가 있어야 고생을 덜 합니다.
모쪼록 마음을 돈독히 가지시고 이 고비를 잘 넘기세요.”
하고 위로하였다.
만명이 그날 저녁에 흥륜사 북편의 외가로 가서 임시로 몸을 의탁하여 지냈다.
한편 숙흘종은 백정왕을 찾아가서 서현을 향리의 태수로 봉해줄 것을 간청하니
대왕이 흔쾌히 이를 수락하며,
“어디가 좋겠습니까?”
하고 물으므로 엉겁결에 용춘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라,
“만노군이 어떨는지요.”
하였다.
왕이 위화부(位和府)에 하문하여 알아본즉 마침 만노군 태수가 중병이 들어
오랫동안 공무를 돌보지 못한다 하니,
“사찬 김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봉하라.”
하고 당석에서 왕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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